우리가 지나온 서툴고 패배한 시간을 되잡는 찬찬한 시선

입력 2021-05-27 20:28 수정 2021-05-27 20:31
소설가 김금희가 지난 21일 벽이 책들로 둘러싸인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새로 나온 소설집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올해로 등단 12년이 되는 김금희는 지금까지 네 편의 소설집과 두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앞으로는 장편 위주로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성호 기자

“그리고 할 수 있는 말과 하고 싶은 말 가운데 문장을 고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라고 적어 보냈다.”

소설가 김금희(42)의 신작 소설집의 표제작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이렇게 끝난다. 대학 시절 만났다가 헤어진 남자 기오성에게 연락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40대의 채은경이 오래 고민하다가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는 이제부터 말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작가는 다만 말을 시작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작가는 “오늘을 얘기하기 위해 과거부터 찬찬히 살피는 것, 그게 내가 글을 쓰는 패턴인 것 같다”고 말했다.

2014년 출간된 김금희의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개정판도 최근 나왔다. 여기 수록한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그는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힘에 대해 얘기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서툴고 부족하고 어쩐지 숨고 싶은 일, 그래서 가끔 첫 작품집을 읽었다는 독자들을 만나면 그 순간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 들곤 했다. 어쩌면 책을 새롭게 내기로 한 데에 동의한 건 그런 나의 주저함을 아예 반대의 방식으로 되잡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놓았던 것을 다시 잡기, 혹은 떠나온 곳을 향해 다시 돌아서기를 뜻하는 ‘되잡기’는 김금희 소설을 읽는 키워드다. 과거로 돌아가 그 시절의 상처나 좌절, 실패 등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실은 우리가 성장하는 이야기였음을 알게 하는 것, “패배의 장면들을 온전한 삶으로, 그랬어도 좋을 삶으로 살려내는 일”(문학평론가 황정아), 김금희는 그런 이야기들을 써왔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제목은 소설 속 노교수의 손녀 강선이 한 말이다. 불안정한 청춘을 보내는 강선은 “넌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피자 이름을 대며 족보와 종택으로 상징되는 기성 세계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고 쿨함을 상징하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말에 배어 있는 냉소와 무기력의 윤리적 책임도 얘기한다. 김금희는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야, 그러면서 이야기를 마칠 수는 없다”고 했다.

김금희는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쓴다”면서 “메시지는 내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이게 문학이기 때문에, 예술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그 메시지를 선언적으로 받아들이면 실패하는 것이다. 그걸 느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메시지가 중심이 된다면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리가 없으니까”라고 설명했다.

소설에서 작가의 메시지는 모호하게 숨겨지게 마련이지만 독자가 그 메시지에 닿게 하는 것은 작가의 일이다. 김금희의 소설에서는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들, 연애적 감수성, 젊은 세대가 공감하는 에피소드와 감정, 시대적 현실 같은 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지금까지 작품을 쓰면서 만족해본 적이 없다. 독자에게 내가 쓰고자 했던 주제를 충분히 전달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그래서 “늘 작업의 끝은 마감일이 결정한다”고 한다. “그 시간까지 계속해서 고친다.”

김금희는 우리가 지나오고 잊어버린 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있었던 어떤 “무르고 환한 마음”을 발견해내곤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인간다움, 그 무른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마음이 있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세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키고 있는 신념이 있다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거야, 그런 말을 하고 싶다.”

2009년 ‘너의 도큐먼트’로 등단한 김금희는 2016년 두 번째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를 통해 동시대 젊은이와 통하는 젊은 작가로 부상했다. 이 작품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우르르 등장해 한국 문학의 판도를 바꾸는 ‘젊은 여성 작가들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김금희는 젊은 여성 작가들을 “여성으로서 자기의 삶을 쓰는 작가들” “윤리적 책무를 갖고 약자들에게 이입하는 작가들” “독자들과 같이 반성하고 같이 고백하려는 작가들”이라고 설명했다. 또 “세상에 막 진입해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젊은 독자들에게 응답하는 소설가들, 젊은 세대의 감정적 질감들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작가들이 2010년대 중반 이후 많이 나온 것 같고, 나도 그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김금희를 비롯해 정세랑 김초엽 장류진 최은영 등 젊은 여성 작가들은 한국 소설의 붐을 이끌고 있다. 한국 소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나이 든 남성 작가들의 이름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한국 문학의 어떤 결핍을 얘기해주는 걸까.

“기성 한국 문학이 여성들의 얘기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실 좋은 여성 작가들이 많았다. 나 역시 한강 박완서 신경숙 은희경 등을 읽으며 20대를 보냈다. 그런데 왜 지금 젊은 여성 작가들 현상일까. 한국 문학은 그때그때 필요한 얘기들을 해왔는데 젊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부족했나, 그런 생각은 든다.”

등단 12년, 젊은 여성 작가들의 맨 앞에 서 있던 김금희는 어느새 40대로 들어섰다. ‘페퍼로니’에 수록된 7편의 단편은 모두 40대에 쓴 것들이다. 그는 “기술적으로 좀 더 편하게 쓴 것 같다”면서 “전에는 마감 스트레스가 더 컸다면 이젠 언젠가는 완성된다는 걸 믿게 됐다. 조금 더 안정된 상태에서 재미있게 쓴 것 같다”고 말했다.

40대의 김금희는 “이젠 뭔가 다른 길로 가야 할 텐데, 그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게 뭘까 고민하게 된다”는 얘기도 비쳤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단편보다는 장편 위주의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김금희는 주로 카페에서 글을 쓴다. 이날 인터뷰를 한 곳은 그가 첫 장편 ‘경애의 마음’(2018년)을 쓰던 시절 많이 찾던 곳이다.

“카페에 나와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게 좋다. 음악이나 풍경 등이 자극이 되기도 하고. 10년 넘게 카페를 돌아다니며 글을 써왔다. 한때 작업실을 따로 마련해 보기도 했는데 작업실 앞에 있는 카페에 나가서 글을 쓰고 있더라, 하하.”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