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해군” 부푼 꿈 vs “반도국가” 벅찬 꿈

입력 2021-05-29 04:02
한국형 경항공모함전투전단 항진도. 해군 제공

영국 해군의 상징인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호’가 7개월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 모항인 포츠머스 왕립 해군기지에서 출항한 퀸 엘리자베스호는 인도-태평양 지역 40여개국과의 군사외교에 돌입한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지나 싱가포르, 남중국해 등을 거친 뒤 한국에 들르는 일정도 포함돼 있다. 이날 해군기지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떠나는 퀸 엘리자베스호의 출항을 지켜봤다.

경항모에 총력전 펼치는 해군

우리 군도 항모를 보유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크기는 다소 작은 3만t급의 경항모지만 함재기 20여대를 탑재할 수 있는 규모다. 경항모 도입은 특히 해군의 숙원사업으로, 지난해 국방부가 2033년 전력화를 발표하면서 계획이 구체화됐다. 군의 목표대로라면 내년부터 국내 조선업계의 설계·건조 기술을 활용해 기본설계에 착수하게 된다.

각종 탐지 장비와 방어 무장을 갖춘 경항모는 전투기와 헬기 등 항공기를 탑재·운용하는 수단이다. 먼바다에서도 우위의 공군력을 점할 수 있다. 위치가 고정적인 기지의 경우 위치가 적에게 이미 노출돼 타격에 취약하지만 바다에서 움직이는 항모의 경우 적이 위치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경항모에 찬성하는 이들은 전시 상황에서 ‘바다 위 공군기지’ 역할을 기대한다. 개전 초 빠른 속도로 전개해 적 주요시설을 타격함으로써 우리 측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효용성보다 한반도 인근의 해상주권 보호에 필수적이라는 목소리도 높다.


주변국들은 앞다퉈 항모 도입에 나서고 있다. 중형급 항모 2척을 보유한 중국은 2049년까지 10여척의 항모를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은 2020년대 중반 이후 작전 투입을 목표로 이즈모급(2만4000t) 대형호위함 2척을 경항모로 개조하고 있다. 우리만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해군은 “지금 설계를 시작해도 10년 후에야 완성된 항모를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반대를 무릅쓰고 거북선을 만든 절박한 심정으로 경항모를 만들겠다”고 호소한다.

돈먹는 하마?… 해군 “모르는 소리”

경항모 도입에는 반대 목소리가 작지 않다. 과거 육군 위주의 군에선 “군사력은 대북 대응에 중점을 둬야 한다” “한반도 자체가 항모”는 무용론이 제기됐다.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인근 해양을 지키는 능력이 우선”이라는 인식도 자리 잡게 됐다. 거대한 경항모가 71척의 잠수함을 가진 북한에 쉬운 표적이 될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예산도 문제다. 함정 설계와 건조에만 2조원이 넘게 투입되고, 연간 운영유지비는 500억원에 이른다. 항모 탑재 전투기 20대 구입에 추가로 3조원이 든다. 항모를 보호할 잠수함, 구축함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증가한다는 지적도 있다.

해군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항모 탐지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사일·잠수함 위협에 맞설 방어·탐지 자산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예산 문제에도 해군은 “기존 함정 확보사업에 따라 2030년 초반에 구축함 18척, 지휘함 2척을 확보하게 된다. 추가 소요되는 비용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건조 비용을 10여년에 걸쳐 분산 투입할 경우 연간 해군 예산의 2.5% 수준에 불과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해군과 경쟁 관계인 육군과 공군도 경항모 도입에 적극적이지 않아 보인다. 한정된 예산을 나눠 써야 하는 이들로선 덩치가 큰 경항모가 달가울 리 없다. 해군은 경항모 함재기 운용을 전적으로 공군에 맡기겠다고 했지만 공군 일각에선 “우리 예산으로 해군용 F-35B를 도입하길 원치 않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해군은 “국가 안보에 육·해·공군이 따로 있느냐. 공군의 역할도 커지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정치논리에 멈춰 선 사업… 軍은 속앓이

군은 지난 2월 서욱 국방부 장관 주재로 경항모 사업 추진을 위한 기본전략을 의결했다. 방위사업청은 경항모 사업의 예산 반영을 위한 사업타당성 조사를 8월 말까지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타당성 조사와는 별개로 경항모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조성을 위한 연구용역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예산권을 쥔 국회가 “연구용역 결과(10월 예정)가 나오기 전까지 타당성 조사를 멈출 것”을 요구하면서 사업에 빨간불이 켜졌다. 군 내부의 회의적 시선과 더불어 여론의 지지가 충분치 않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여당의 공약사항이라는 이유도 야당 반대에 한몫했다는 전언이다. 내년도 예산에 경항모 사업을 반영해야 하는 군으로서는 속이 타들어 가는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예산 정국에 어떻게든 경항모 사업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지 않으면 끝내 무산될 것이란 위기감까지 감지된다.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자산을 국내 정치적인 논리로 바라봐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충분한 검토를 통해 시급성을 따져 볼 기회도 주지 않는 현 상황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구민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28일 “경항모는 이미 정치의 영역에 들어간 사안”이라며 “무조건 반대에 나서는 것은 국익 차원에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퀸 엘리자베스호, 구원투수 될까

거대한 위용을 갖춘 퀸 엘리자베스호의 8, 9월 한국 방문 일정이 방황하는 경항모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거대한 항모를 국민이 직접 눈으로 보고 체감한다면, 여론이 바뀔 수 있다는 기대다. 해군 역시 퀸 엘리자베스호의 방문에 맞춰 역량을 모은다는 계획이다. 해군 관계자는 “이지스함 도입 전에도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지만 지금은 한 해 240여일 작전에 투입할 정도로 감지 자산으로서 필수적 역할을 하고 있다”며 “중견국가 위상에 맞게 ‘항모보유국 대한민국’으로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