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에 맞춰 44조원 투자 패키지를 발표한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정말 고마워한다”는 말로 미국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기업들 때문에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새삼 느꼈다’는 반응도 있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공동회견에 참석한 한국 기업인들에게 일어서줄 것을 요청한 후 박수와 함께 ‘땡큐’를 연발했다.
미국과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엔 반가운 장면일 리 없다. 실제 바이든 행정부의 중국 때리기는 도널드 트럼프 때의 관세 부과처럼 즉각적이진 않지만 훨씬 정교하다. 중국 대 미국 중심의 ‘반중국 연합’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밑그림을 그리고 하나하나 행동에 나서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밸류체인(GVC·가치사슬) 구축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바이든이 행동에 나선 이유는 단호한 미국 내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1~2년 내 중국을 빼고 밸류체인을 재구축해야 한다는 쪽으로 미 여야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국가 주도 자본주의’ 중국과의 체제 싸움에서도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됐다는 평가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사활을 걸고 있는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부문의 강자인 한국 기업이 대규모 투자로 밸류체인 재구축 구상에 힘을 실어줬으니 미국 입장에선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등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수요가 20년 내 30배 가까이 늘어나고, 2025년부터 배터리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국 생산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정책에 힘입어 이미 중국 기업은 이차전지 부문 세계 1위에 올라 있다. 생산 공장 수만 해도 미국의 수십 배다. 만약 미국에 공장을 짓겠다는 한국 기업이 없었더라면 바이든 정부의 구상은 말 그대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들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백신 협력이 급한 현 정부를 돕기 위한 ‘퍼주기’였다고 보기엔 그 규모가 너무 크다. 개인적으론 정부나 정치권보다 더 전략적 사고를 하는 기업들의 통찰이 작용했다고 본다.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전략적 모호성 유지가 어려워진 상황에선 미국 편에 확실히 서는 게 유리하다고 계산했다는 얘기다.
중국 보복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한국 기업들의 결정 이면에는 중국을 보는 선진국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주식 등 언제든 쉽게 빠질 수 있는 부문에서만 이뤄지는 분위기다. 중국 국채 등 장기 투자물의 인기는 급속히 식고 있다. 거리낌 없이 타국 제품을 복제하고, 주변국의 미세먼지 고통에 눈감고, 홍콩 인권을 옥죄는 나라에 대한 장기 투자를 불안해한다는 얘기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트렌드에 합류한 우리 기업도 이런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도 중국에 유리하지 않다. 미국 퓨(Pew) 리서치센터가 지난해 13개국 국민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대부분 국가에서 70%가 넘을 정도로 크게 악화됐다.
사드 보복 사태가 재연되더라도 이젠 견딜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수도 있다. 현대자동차만 보자. 사드 보복 여파로 여전히 중국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글로벌 강자로서 입지는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여기에다 한국의 대중국 수출 중 소비재 비중이 5% 수준이어서 불매 운동 영향도 크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수도 있다. 특히 우리보다 더 강한 중국의 보복 조치에도 끄떡없던 대만 기업들이 최근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나선 점도 우리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