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카뮈를 에세이로 만난다면…

입력 2021-05-27 19:49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꼽히는 ‘나만의 방’으로 유명한 영국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왼쪽)와 ‘페스트’ ‘이방인’ 등을 쓴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 이들의 산문을 만날 수 있는 산문집들이 최근 일제히 출간됐다. 온다프레스·사월의책 제공
20세기 초반의 영국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수필을 현대의 발명품으로 봤다.

“사사로운 수필은 그 시대(몽테뉴) 이래로 상당히 흔하게 쓰였지만, 우리 시대에 그것이 누리는 대중적 인기는 워낙 엄청나고 특이해서 그 형식을 우리 시대의 형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수필의 대중화에 대해선 “노골적인 자기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예”라며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아주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런 위업이 실제 성취되는 일은 드물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수필을 많이 썼다.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정소영씨는 “그가 잡지에 기고한 서평과 산문이 600여편에 달한다”며 “글쓰기는 울프의 삶 자체였다”고 말한다.


위의 문장이 담긴 ‘수필의 쇠퇴’라는 글은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온다프레스)에 수록됐다. 정씨는 “산문이라는 덜 알려진 장르의 글에서 나타나는 울프의 면모를 한 권의 책에 담아 소개하고픈 마음에서” 산문 13편을 골라서 번역해 묶었다고 밝혔다.

이 산문집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더니스트 소설가나 ‘자기만의 방’으로 유명한 페미니스트와는 사뭇 다른 울프의 면모를 보여준다. 메시지에 가려진 태도나 스타일을 보게 한다고 할까. 치열한 독서가로서 모습, 지금 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 당대의 문학이론과 작품들에 대한 비판, 위트가 넘치면서도 솔직한 문체 등이 이 신화적인 작가에 친근하게 다가서도록 만든다.

‘가만히, 걷는다’는 출판사 봄날의책이 펼치는 세계산문선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앞서 선보인 미국산문선 ‘천천히, 스미는’과 일본산문선 ‘슬픈 인간’은 유명 작가의 수준 높은 산문을 엄선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가만히, 걷는다’는 근현대 프랑스 작가 21명의 산문 36편을 수록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기 드 모파상,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셀 프루스트, 샤를 보들레르, 알베르 카뮈, 스탕달, 앙드레 지드, 알퐁스 도데,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프랑수아즈 사강 등 프랑스 문학사에 별처럼 박혀있는 대가들의 산문이 책 한 권에 다 모였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신유진씨가 작품을 고르고 번역했다. 그는 “만약 누군가 이 책의 목적지를 묻는다면 그런 것은 없다고, 어쩌면 헤매는 시간이 전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라며 “헤매는 시간 동안 아름다운 것들을 만난다면 그것 또한 산책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가만히, 걷는다’ 속으로 가만히 걷다 보면 “아이들은 거의 인생만큼이나 성가시다”(뒤라스) “다시, 쉼 없이, 우리의 상실을 향해 달려가자”(카뮈) “나는 파리를, 아니 프랑스를 떠났다. 마침내 에펠탑이 너무 지겨워졌기 때문이다”(모파상) 같은 문장들과 만난다.

여름날 센강에서 부랑자와 우정을 나누는 열여섯 살의 사강,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지드, 공군 장교 시절의 생텍쥐페리도 만난다. 거기엔 사랑에 실패한 상드, 낯선 도시로 떠나온 가난한 청년 도데도 있다.


일본 순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미야모토 테루(사진)의 에세이집 ‘생의 실루엣’(봄날의책)도 우아한 산문의 세계를 보여준다. 1947년생인 테루는 49년생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동년배 작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름다운 데뷔작 ‘환상의 빛’은 테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된 소설이다.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반딧불 강’ 등 테루의 대표 소설들은 국내에도 번역돼 읽혀왔다. 번역가 이지수씨는 “그의 소설을 조용히 아껴온 팬들이 국내에도 적지 않다”면서 “나 역시 담백한 문체로 일상의 파문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그의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생의 실루엣’은 국내 처음 출간되는 테루의 에세이집이다. 그가 60대를 보내며 2017년까지 10년간 한 잡지에 1년에 두 편씩 연재했던 산문들을 모았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추억들을 소재로 삼았지만 한 편 한 편이 단편소설처럼 읽힌다. 마음을 물들이고 여운을 남긴다. 노련한 솜씨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