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루카센코(78) 벨라루스 대통령이 정적을 체포하기 위해 여객기를 강제로 착륙시켰던 당시 구체적인 상황이 공개됐다. 승객들은 여객기가 강제착륙을 위해 갑자기 고도를 내리면서 기내는 아수라장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루카센코 대통령의 표적이 된 로만 프라타세비치(26)는 “사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며 두려움에 떨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24일(현지시간) 주요 외신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전날 오전 9시47분쯤 벨라루스 상공을 지나던 라이언에어 FR4978 여객기가 갑자기 기수를 꺾었다. 민스크에 착륙하기 전 40여분은 공포의 아수라장이었다. 외신과 만난 승객들은 “비행기가 아무런 안내 방송 없이 급강하했다”면서 “급격히 내려꽂히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승객은 “프라타세비치가 짐칸에서 노트북을 꺼내 해체하면서 ‘나는 사형당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여객기는 전날 오전 그리스 아테네를 출발해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향하고 있었지만 벨라루스 공군 전투기가 접근해 ‘폭발물 테러 위협이 있으니 민스크 공항으로 향하라’는 통보에 방향을 바꿨다.
여객기가 착륙하자 벨라루스 경찰은 기내에 있던 프라타세비치를 체포했다. BBC는 “착륙 직후 폭발물 수색을 진행했지만 특이점을 찾지 못해 다시 빌뉴스로 향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전했다.
체포 후 벨라루스 국영방송이 공개한 영상에서 프라타세비치는 검은색 옷을 입고 두 손을 잡은 채 “심장을 포함해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면서 “직원들이 가능한 한 올바르고 합법적으로 대하고 있다. 민스크에서 대규모 소요를 조직한 혐의를 자백했다”고 말했다.
프라타세비치는 벨라루스 반정부 시위 관련 뉴스를 배포하는 텔레그램 채널 ‘넥스타(Nexta)’를 만든 인물이다. 28년째 집권 중인 루카센코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SNS 등을 통해 루카센코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대선에서 6선 연임을 하기 위해 부정을 저질렀다고 꾸준히 폭로해왔다. 일각에서는 정보기관 요원이 여객기에 탑승해 있어 프라타세비치의 존재를 파악했다고 보고 있다. 마이클 올리어리 라이언에어 최고경영자(CEO)는 “여객기에 벨라루스 정보기관 KDB 요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민스크에서 이륙할 때 5명이 탑승하지 않았다. 이들을 요원으로 추측하지만 확실치 않다”고 주장했다.
서방세계는 벨라루스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제제재를 결의했다. EU 회원국 정상들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벨라루스 국적기의 역내 비행과 공항 이용을 금지하는 등의 제재안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이미 네덜란드 KLM과 독일 루프트한자 등은 이날 벨라루스 영공을 지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교통부도 국적사들에 벨라루스 비행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벨라루스 외무부 관계자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기내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신고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벨라루스 정부는 이날 자국을 비판한 라트비아에 24시간 내 외교관 퇴거명령을 통보했다.
벨라루스는 이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자국을 침공할 것을 우려한다며 육상국경을 봉쇄했다. 미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경제제재 등으로 영공까지 막힐 경우 벨라루스는 ‘유럽의 북한’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