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정부 욕하는 답답한 마음도 알지만

입력 2021-05-26 04:05

미국에서 지내면서 적응이 안 됐던 것 중 하나가 느린 속도였다. 한국이었다면, 일주일이면 끝낼 도로 공사가 몇 달째 계속돼 차가 밀렸다. 서류 하나 떼려면 일주일은 각오해야 했다. 그런 미국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대해선 완전히 달라졌다. ‘빨리 빨리’의 원조인 한국 사람의 눈에도 경이로운 속도전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백신 핵심 전략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일단 많이 맞히고 보자’다.

백신 접종 센터에서도 체온을 재지 않는다. ‘오늘 아픈 데는 없나’라는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고, ‘아프지 않다’고 하면 백신을 놓는다. 예약 없이 찾아갈 수 있는 ‘드라이브 스루’ 접종 센터도 크게 늘었다. 애리조나주에선 프로 미식축구팀 홈구장에 하루 24시간 백신을 놓는 드라이브 스루 접종 센터가 마련돼 지난 1월 중순부터 운영됐다. 메릴랜드주에선 대형 놀이공원에서 예약 없이 백신을 맞을 수 있다. 속도전의 성적표도 좋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24일(현지시간) 1억6390만명의 미국인이 최소 한 차례 백신을 맞았다고 밝혔다. 미국 전체 인구(3억2820만명)의 49%다. CDC는 또 백신을 2차례 맞아 백신 접종이 완료된 미국인은 1억3060만명이라고 집계했다. 미국인의 39%다.

하지만 숫자 속에 더 큰 성과가 숨어 있다. 미국에서 12∼15세를 대상으로 백신 접종이 시작된 것은 2주 전이다. 12세 미만 어린이·유아에 대해선 백신 접종이 아직 승인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자발적으로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웬만한 성인들은 백신을 한 번 정도 맞은 것으로 추산된다. 백신 접종 확대는 즉각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주 전과 비교해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38% 감소했고, 사망률은 15% 줄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적지 않다. 또다시 워싱턴 거리에선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CDC가 지난 13일 백신 접종을 완료한 경우 실내외 대부분의 경우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발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 바이든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한·미 백신 스와프’는 성사되지 않았다. 백신 스와프는 미국의 백신 여유분을 한국에 미리 공급하고, 한국이 이를 나중에 갚는 방식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을 ‘방역 우수국가’로 분류해 지원 대상국에서 제외했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하지만 백신 외교에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포괄적인 한·미 백신 파트너십을 구축했고,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군 55만명에 대한 백신 직접 지원을 약속했다. 또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모더나사와 위탁생산 계약을 체결하는 등 민간 분야 진전도 있었다.

백신은 단순히 보건 문제를 넘어 안보와 경제·정치 이슈가 됐다. 백신 하나로 미국은 전혀 다른 나라가 됐다. 사람들이 일상 생활을 되찾고,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 눈으로 보인다. 한국이 백신을 서둘러 확보하지 못한 데 대해 문재인정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정부 욕을 하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코로나19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도 나오고, 제2·제3의 바이러스가 인류를 덮칠 수 있다는 경고도 있다.

그래서 최소한 백신 확보가 늦어진 데 대해선 정부와 학계 차원에서 위원회를 만들어 백서라도 만들었으면 한다. 이런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보건과 관련한 결정에 대해선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방안도 논의됐으면 좋겠다. 과거사에 대해선 재조사도 많이 하던 문재인정부가 아니던가.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