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신학생을 가르치다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한 교수가 있었다. 옛 동료가 그분에게 “매일 새벽기도 인도하느라 힘들지요”라고 물었더니,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도 학생들 시험 본 거 채점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전·현직 신학교 교수 사이 오간 말속에 뭔가 공감을 불러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에 전인적 고통을 일으키는 ‘채점’이라는 노동이다. 6월이면 대학교에서는 기말고사 기간이 시작된다. 학기 초 반짝이던 학생의 얼굴도 이때쯤이면 누적된 피로에 발효된 듯 묘한 빛깔을 띠게 된다. ‘많은 것을 배워야지’에서 ‘어떻게든 학기를 끝내자’로 학습 목표를 이미 수정한 학생도 적지 않다. 이상과 현실을 타협해낸 결과물인 보고서와 답안지가 채점을 기다리며 교수연구실 한쪽에 탑처럼 쌓이면, 며칠간 다른 일 제쳐놓고 채점에 매달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채점은 아직 생각이 영글지 않고 기술적으로 서툰 학생의 글을 읽고 평가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작업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다른 사람의 노력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채점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학생은 밤잠을 설치며 공부한 내용을 압축해 시험 답안이나 보고서를 썼는데, 이를 후루룩 읽고 점수를 매기려니 미안한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글 속에 다 담지 못한 좋은 생각은 없었는지, 내가 내준 과제가 학생의 장점과 잠재력을 평가하기에 적절한지 등 여러 고민이 밀려온다. 또한 아침에 마신 커피의 효력이 충만할 때와 늦은 오후 카페인 고갈로 집중력이 흔들린 때의 채점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텐데, 혈중 카페인의 불균등에서 파생된 불공정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채점이란 무엇인가’를 이리저리 생각하다 새로 깨달은 점이 있다. 이제껏 채점할 때 주로 시험은 학생이 치고 평가는 교수가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학창 시절 내내 어설픈 글을 인내하며 평가해준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누군가의 글을 채점하는 위치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여러 학생이 내가 진실하고 공정하게 채점할 것이라고 (어느 정도는) 믿어주는 덕분에, 나는 ‘감히’ 그들에게 성적을 부여할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세워지려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의 도움과 신뢰, 기대가 그 사람을 떠받쳐줘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험을 내고 채점하는 방식으로 제자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뒤따라 시험과 과제를 없애자고 섣불리 말 못 하는 것이, 평가 과정 없이는 현실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현대 교육의 평가시스템을 모르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매 학기 성적을 매길 때 종종 떠오르는 한마디가 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이 경고처럼 교육 현장에서 학생의 실수를 잡아내면서도, 나 자신의 오류와 무지는 보지 못할 때가 종종 발생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채점 상황에서는 다음과 같이 패러디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생들의 답안에 있는 교수로서 너의 호의는 보면서, 채점을 하는 네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의 은혜와 학생의 신뢰는 깨닫지 못하느냐.”
학기 말이 다가오며 말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기말고사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에게도 스트레스를 주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이 힘들더라도 주님이 완성할 미래에 대한 희망은 놓지 말자. 참스승이신 주께서 오시면, 다시는 지금 같은 시험도 없고, 과제도 없고, 채점도 없고, 성적표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