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창 낳은 영남 대표 선비마을, 함양 개평마을

입력 2021-05-26 21:40 수정 2021-05-26 21:44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 위에서 드론을 통해 내려다본 모습. 돌담길로 연결된 60여채의 전통 한옥이 다정하게 서로 기대고 있다. 중간쯤 키 큰 나무 오른쪽 마당 넓은 집이 일두 고택이다.

경남 함양은 예부터 ‘좌 안동 우 함양’이라 불리는 선비의 고장이다. 함양 중앙부에 자리 잡은 개평마을은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의 대표 선비마을이다. 하동 정씨와 풍천 노씨, 초계 정씨 3개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조선조 5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과 옥계 노진 등을 배출했다. 일두 고택을 비롯한 많은 전통 가옥에서 선조들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형이 마치 댓잎 네 개가 붙어 있는 개(介)자 형상이어서 ‘개평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마을에는 돌담길의 담장이 길게 이어져 있고 60여 채의 전통 한옥이 다정하게 서로 기대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문을 닫은 일두 고택 솟을대문.

그 가운데 일두 고택은 정여창의 생가 자리에 지은 건물이다. 그가 별세한 지 약 100년 후 후손들이 중건했다. 일두 고택은 당초 17동이었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사당, 문간채 등 12동만 남아 있다. 고택 솟을대문에 나라에서 내린 붉은 바탕에 흰 글씨의 정려편액인 효자문 문패가 다섯 개나 걸려 있다. ‘토지’ ‘다모’ ‘미스터 션샤인’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재 코로나19 여파로 문을 닫았다.

정여창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다.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해 성리학의 대가로 성장했다. 함양 지역을 중심으로 후학들을 양성했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은 김굉필과 함께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당시 문묘에 종사된 5현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김종직에서 비롯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두 차례 사화에 연루돼 유배 갔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정여창의 호 ‘일두’는 ‘하나의 좀벌레’란 뜻으로, 자신을 낮춰 표현한 것이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이천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에 쓴 ‘천지간일두’에서 따왔다. 정이천은 글에서 ‘책을 좀 읽었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을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개평마을은 ‘자갈한과’로 유명하다. 여느 한과와 다른 점이 여럿이다. 전통 과자인 한과는 식용유에 튀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마을 한과는 뜨거운 자갈에 구워 만든다. 손으로 만드는 수제 과자인데 제조방식도 이 마을 대대로 내려온 옛날 방식 그대로다. 기름을 넣지 않고 구워내기 때문에 느끼한 맛이 없고,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게 특징이다. 기름에 튀긴 유과가 시간이 지나면 처지고 눅눅해지는 반면 자갈한과는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남계서원.

개평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계서원이 있다. 지방 유림이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 소수서원에 이은 두 번째 사액서원으로, 201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아홉 곳 중 한 곳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함양 지역 의병 활동을 주도한 곳이다.

출입문인 풍영루가 오랜 세월을 이겨낸 품위를 풍긴다. 풍영루를 지나면 좌우에 연꽃을 심은 연지가 자리한다. 동재인 양정재에는 ‘연꽃을 사랑하는 집’이라는 뜻의 ‘애련헌’ 현판이 걸려 있다. 서재인 보인재의 현판은 ‘영매헌’이다. 중앙의 명성당은 학습 공간이다. ‘명성’은 ‘중용’에 나오는 말로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는 뜻이다.

청계서원.

남계서원 바로 옆에 청계서원이 자리한다. 김일손이 1495년에 청계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수학하던 곳이다. 김일손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망하고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무오사화 때 청계정사에서 붙잡혀 능지처참 형을 받았다. 이후 정사는 폐사됐다. 1905년 유림에서 옛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이후 정사 재건을 위한 모금운동 등을 통해 1921년에 준공했다. 서원 안 강당 앞에 누운 듯 다시 일어선 운치 있는 소나무와 꾸밈없는 작은 연못의 분위기가 고즈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