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에 빠진 2년차 나를 어루만진 아델의 노래

입력 2021-05-26 04:05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3년차 임희정이 24일 경기도 파주 비올스튜디오 대기실에서 후원사 화보 촬영을 앞두고 음악을 들으며 반려견 ‘모찌’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임희정은 “부진했던 지난해 영국 가수 아델의 곡에서 위로를 받았다”며 재도약을 다짐했다. 올 시즌 초반 출전한 6개 대회에서 3차례를 ‘톱5’로 완주해 우승 사냥을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파주=이한결 기자

임희정(21·한국토지신탁)에게 프로 2년차였던 지난해는 혹독한 겨울과 같았다. 평균 타수(70.40타)·퍼팅(30.10타), 그린 적중률(77.6852%) 같은 주요 지표에서 대부분 ‘톱5’에 들었는데, 유독 우승이 없었다. 그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대회를 줄줄이 순연하면서 늦가을까지 펼쳐졌다. 낙엽이 질 무렵, 임희정의 평균 타수는 71~75타 사이를 오가며 요동쳤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10위권 진입도 쉽지 않았다. 2년차 징크스라도 찾아왔던 것일까. 전년도인 2019년 KLPGA 투어에 데뷔한 신인 중 가장 많은 3승을 수확하고 ‘돌풍의 루키’로 불린 선수가 바로 임희정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필드를 떠나는 길, 어두컴컴한 밤이 돼서야 도착한 집에는 언제나 반갑지 않은 적막이 찾아온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어쩌면 적막만이라도 깨고 싶은 생각에 음악을 찾는다. 임희정의 지난겨울 어느 하루는 조금 달랐다. 영국 가수 아델의 2016년 곡 ‘웬 위 워 영’(When we were young)의 가사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여기 모든 사람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당신에게 집 같은 안락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현실의 꿈같은 존재죠. 당신이 이곳에 혼자 있다면, 내가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을까요. 내가 떠가기 전에요. 나는 많은 밤들을 홀로 지내왔거든요. 내가 알아 왔던 그 사람이 당신이기를 바라면서….’

느낌대로, 우연하게, 분명하게 선호하는 장르는 있지만 가끔 유행을 좇는 임희정의 음악 취향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감동을 주는 곡을 찾을 땐 가사의 의미를 찾아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놓는다. 무관으로 시즌을 끝내고 찾아온 지난해 혹독했던 겨울, 임희정은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지나간 사랑과 젊은 시절을 노래한 아델의 ‘웬 위 워 영’을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지난 24일 경기도 파주 비올스튜디오에서 만난 임희정은 “평소 팝을 즐겨듣는다. 유독 힘들었던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발라드를 좋아하게 됐다. 특히 나를 위로하는 것만 같은 아델의 곡이 마음에 와닿았다”며 “발라드에 이별가가 많다. 그 이별의 대상이 꼭 연인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는 일, 그 일과 나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생각할 때 위로를 받고 싶을 수 있다. 그 차분한 발라드가 감정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CCM도 크리스천인 임희정의 힘든 시기를 다독였다. 임희정은 “때때로 주변에서 CCM을 추천받지만, 평범한 신앙심을 가진 나로서는 찬송가 외에도 들을 음악이 많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대중가요처럼 들을 수 있는 CCM이 많았다. 위로를 받는 느낌이 좋았다”고 했다. 임희정은 지난겨울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알게 된 마커스워십의 ‘꽃들도’를 최근 즐겨듣는 CCM으로 꼽았다.

골프는 집중력을 요하는 ‘멘탈 스포츠’다. 퍼트는 종잇장 간격으로 홀컵 안에 들어가거나 바로 앞에 멈출 수 있다. 그 결과에 따라 버디와 파, 혹은 파와 보기가 나뉜다. 결국 정신력이 스코어의 당락을 결정한다. 하나가 더 있다. 적절한 순간에 클럽을 꺼내 쓰는 전략의 요소다. 임희정의 스마트폰 플레이리스트는 저마다 다른 번호의 아이언을 담은 골프백처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담고 있다.

아델, 샘 스미스, 코난 그레이, 두아 리파 등 영미권 팝가수의 음악 사이사이에 방탄소년단(BTS), 아이유, 지코, 창모 같은 국내 가수들의 음악이 임희정의 플레이리스트를 채웠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최상단의 세 곡이다. 방탄소년단의 신곡 ‘버터’가 최상단에 자리했고, 그 밑에 NCT 드림의 ‘추잉검’과 ‘맛’이 차례로 나열됐다.

임희정은 “플레이리스트 대부분을 팝으로 채웠지만, 경기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분위기를 끌어올릴 때는 K팝 아이돌 음악도 듣는다”고 했다.


음악의 위로가 통한 것일까. 임희정은 프로 3년차로 넘어온 2021시즌 KLPGA 투어 초반, 괄목할 만한 질주를 시작했다. 출전한 6개 대회에서 ‘톱5’만 3차례 들었다. 톱10 피니시율은 66.67%로 공동 2위. 아직 시즌 첫 승을 신고하지 못했지만 상위권 완주가 많아 대상 포인트 랭킹 3위(135점)에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성과는 비거리다. 임희정의 올 시즌 초반 평균 드라이브 비거리는 251.71야드로, 지난해(240.97야드)보다 10야드 이상을 늘렸다. 161㎝인 임희정의 신장은 다소 작은 편이지만 타고난 긴 팔과 지난겨울 훈련의 성과로 비거리를 크게 늘렸다.

임희정은 “그동안 비중을 두지 않았던 상체 훈련의 양을 늘렸다. 그 덕에 비거리를 늘렸고 경기도 수월해졌다”며 “이제 정확도가 중요하다. 성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쇼트게임에서 버디 확률을 높이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파주=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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