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극단의 ‘파묻힌 아이’(5월 27일~6월 6일 경기아트센터 소극장)는 지난해 5월 공연될 예정이었다. 미국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샘 셰퍼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2019년 12월 취임한 한태숙(71) 예술감독이 경기도극단에서 시즌 개막작으로 직접 연출에 나섰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 10월로 연기됐다가 취소됐고 이번에 다시 열리게 됐다. 한 감독은 최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같은 작품이지만 배역이 일부 바뀌면서 연습도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했다. 코로나19로 공연이 귀해지니까 저와 배우 모두 올해는 꼭 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말했다.
‘파묻힌 아이’는 경기도극단 배우들과 함께 손병호 예수정 등 객원 배우가 호흡을 맞춘다. 한 감독은 “예수정과 손병호가 TV나 영화로 바쁜데도 무대 작업을 우선시해줬다”며 고마워했다.
1년 늦게 관객과 만나는 ‘파묻힌 아이’는 2017년 별세한 극작가 샘 셰퍼드에게 1979년 미국 최고 문학상인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가장 미국적인 작가라는 셰퍼드의 가족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근친상간과 자식 살해 등을 다뤘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한다. 가족이 가족을 해치고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한 사회의 단면을 통해 ‘가족과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셰퍼드의 작품에는 큰 흥미가 없었어요. 인연이 되려는지 이 희곡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추천해줘 읽었는데 매력을 느꼈습니다. 희생과 제의 등 제가 천착해온 인간의 원형질 요소를 발견했거든요.”
한 감독은 최근 빈번하게 보도되는 아동 학대 사건을 봐도 친족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1년 국립극단의 ‘오이디푸스’부터 ‘파묻힌 아이’까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주제를 붙들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내게 영원히 떨쳐버릴 수 없는 소재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연의 영상화와 온라인 스트리밍이 익숙해지는 등 코로나 시대의 달라진 연극 환경 속에서 연극의 의미는 뭘까. 한 감독은 “지금이야말로 더 많은 연극이 무대에 오르고 더 많은 사람이 극장에 가야 한다. 피폐해진 세상을 비판하고 위안을 주고받을 곳은 연극 현장밖에 없다”면서 “사람들이 발열 체크 등을 기꺼이 받으며 공연장에 들어가는 게 일종의 제의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공연의 온라인 스트리밍에 대해선 거부감을 보였다. 국공립 예술단체의 경우 민간보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데다 복지 차원에서 영상화와 스트리밍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이다. 그는 “공연예술은 ‘사라지는 예술’이기에 더 애착을 갖게 된다”면서 “공공 단체인 이상 영상화나 스트리밍을 피할 순 없지만 공연 영상이 기록 자료 이상으로 사용되는 것엔 거부감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수차례 국공립 극단의 수장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던 그는 고희가 지나 경기도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1년 반 동안 경기도극단을 이끌어온 소회를 묻자 “예술감독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하고 싶은 작업을 다 하도록 해주겠다는 경기아트센터 사장님의 제안에 솔깃했기 때문”이라며 “막상 예술감독이 된 후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30명의 단원이 소속된 경기도극단에 와서 연극은 혼자의 작업이 아니라 함께하는 작업임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올해 경기도극단은 ‘파묻힌 아이’ 이후에 김정 상임연출의 ‘시련’(아서 밀러 작)을 7월에, 경기도극단 희곡 공모전 선정작인 ‘위대한 뼈’를 한 감독의 연출로 11월에 올릴 예정이다. 내년에는 어린이연극페스티벌 개최와 김광보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협업도 기획하고 있다.
이제 연극 애호가라면 경기도극단의 작품을 챙겨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물론 경기도극단의 존재감은 한 감독에게서 온다. 고희가 넘었지만 연극에 대한 한 감독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은 듯하다.
“열정이 아니라 중독된 것 같아요. 아직도 연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경기도극단 예술감독 자리를 받아들인 건 무엇보다 작업 욕구가 컸기 때문이었어요. (중독에 대한) 해독제는 희곡을 쓰며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는 것밖에 없겠죠.”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