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오늘 밤도 잘 자요, 당신

입력 2021-05-26 04:03

잠이 오지 않는다. 베개를 고쳐 놓고 다시 눈을 감아본다. 릴랙스, 릴랙스. 불면증에 좋다며 친구가 선물한 라벤더 오일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베갯잇과 이불에 뿌려 놓았건만, 소용없다. 라벤더 향은 망각의 휴식처인 잠 속으로 빠지게 하는 대신 먼 기억까지 불러낸다. 잔인하기도 하지. 오늘 밤도 잠은 다 잤다. 몇 년 전부터 불면증이 생겼다. 일이 많아졌고, 하루가 분주했다. 잠을 못 자 괴로움을 호소하는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런데 어느 날, 검은 망토를 입은 불면의 사자가 예고도 없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그날 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워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반짝였다. 매일 밤, 잠이 안 올까 어찌나 두렵던지 밤 9시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좋아하는 커피도 끊었다. 홍차나 녹차의 카페인도 극렬하게 내 신경을 방해했다. 낮 동안의 모든 일상 속에서도 나는 잠을 생각했다.

“약을 드세요.” 같은 팀원들과 점심식사를 하다가 불면증 때문에 고생한다는 나의 말에 20대 후반의 남자 후배가 시큰둥하게 답한다. 세상 고민거리가 수두룩한데, 뭘 그런 걸로 걱정하냐는 투다. 자신은 병원을 다니며 약을 처방받은 지 오래됐고, 이제는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한다. 30대 초반의 다른 후배 몇 명도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먹고 있단다.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꽤나 당황했다. 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 받아 먹기 시작하면 마치 큰일처럼 생각하던 때에 살았으니까.

잠으로 돈을 버는 시대다. 수면장애로 고생하는 현대인들을 유혹하는 약과 제품, 치료법이 넘쳐난다. 인간은 밤이 되면 당연히 잠들 거라 생각했던 시대는 전기의 발명과 함께 끝났다. 이제 도시는 잠들 줄 모른다. 택배 업체는 밤새 돌아가고, 사무실 형광등은 꺼질 줄 모른다. 도시의 불빛은 현대인들의 신경을 한껏 옥죄고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튜브에는 ‘잠이 잘 오는 음악’이라는 이름을 붙인 동영상이 넘쳐난다. 어떤 영상은 조회수가 3000만회가 넘는다.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안도감. 잠 못 이루는 밤은 나에게만 고통이 아니었구나. 유튜브와 SNS라는 공간 속을 몽유병 환자처럼 서성이다가 나처럼 잠 못 이루는 누군가를 마주친다. 하지만 빗소리도, 불멍 불빛 영상도, 책 읽어주는 목소리도 어느 하나 나를 잠들게 하지 못했다.

치료제는 우연히 만났다. 다큐멘터리 ‘막스 리히터의 슬립(Sleep)’. 클래식 음악의 연금술사라 불리는 리히터는 2015년,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자장가 ‘슬립’을 발매했다. 태아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느끼는 충만한 안도감과 편안함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신경과학자와 함께 작업을 했다. 곡의 길이는 무려 8시간23분. 리히터는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는 그 시간을 음악으로 가득 채워 선물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2018년 미국 LA에서 열린 야외음악회 ‘슬립’의 8시간 연주를 기록한 영화다. 실제로 관객들은 도심 공원 속에 펼쳐진 간이침대에서 공연을 감상한다. 누군가는 깊은 잠에 들고, 또 누군가는 그 밤을 지새워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기도 한다.

그렇게 밤을 보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리히터의 음악과 함께 새벽빛을 맞이한다. 매일 짧은 죽음과 생을 경험하는 인간 신체의 놀라운 순환, 태곳적부터 약속돼 있던 그 리듬이 깨진 현대인들에게 리히터는 말한다.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광적으로 돌아가는지, 우리에게 얼마나 휴식이 필요한지. 함께 깊은 잠에 빠졌던 연인들은 눈을 뜨자마자 따뜻한 키스를 나누고, 중년 여인은 새벽빛 속에서 깊은 명상을 한다. 무대 위 연주자들에게 길고도 긴 박수가 쏟아진다. 모두가 긴 밤을 평안히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는 안도감, 새날이 시작된다는 희망. 우리에게 깊은 잠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니 오늘 밤도, 잘 자요, 당신.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