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디지털 의학 시대… 여전히 손발 고생시키는 ‘병리 진단’

입력 2021-05-25 04:07 수정 2021-05-25 18:13
의료진은 손품… 환자 발품 팔아야
디지털화 비용 병원당 최대 100억
고비용에 못 나서… 정책 지원 필요

암 치료의 방향을 결정하는 새로운 병리 진단 방식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 암 판정 관련 병리 진단은 디지털화가 더뎌 수작업으로 진행했지만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병리 인프라의 전면 디지털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른쪽 아래 작은 사진은 갑상샘암의 조직 슬라이드. 사진=게티이미지뱅크·셔터스톡·인터넷 블로그 캡처

김모씨는 얼마 전 갑상샘암 확진을 위해 찾은 대학병원에서 기존 병원의 ‘병리 슬라이드(떼낸 조직의 조각)’ 제출을 요구받았다. 조직 슬라이드를 서류 정도로 여겼던 김씨는 진료 기록과 사본을 발급받아 제출했다. 하지만 대학병원 진료 당일에서야 현미경 검사를 할 때 쓰이는 슬라이드라는 것을 알고 이전 병원에 부랴부랴 반출을 신청했으나 당일 발급이 어려워 다시 진료를 예약해야 했다.

암 판정과 치료를 받으려면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바로 병리 진단이다. 병원 내 병리과에서 암 진단을 내려야 비로소 암 환자로 인정된다. 암 치료의 시작이자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첫 단추인 병리 진단이 요즘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유전질환을 미리 알아내고 인공지능(AI)이 질병 진단을 돕는 시대지만, 암 진단은 일일이 수작업에 의존해 디지털화되지 않은 몇 안되는 분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수작업 의존 ‘암 진단’

암 진단은 암 소견이 있는 조직·세포 일부를 떼내 필요 시 염색해서 얇은 슬라이드로 만든 다음 병리과 의사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판독하는 과정이다. 절제된 조직과 만들어진 슬라이드는 병원 창고에 보관되는데, 환자 한 명 당 많게는 10~30장의 슬라이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MRI나 CT, 초음파 등 다른 영상진단 데이터는 이미 디지털화된 지 오래다. 병원에서 찍은 영상 자료는 환자가 필요로 하면 언제든 CD로 복사해 다른 병원에 곧바로 제출할 수 있다. 하지만 병리 슬라이드는 다르다. 디지털화가 되지 않다 보니 조직 검사를 한 병원에서 환자 몸에서 떼낸 조직을 보관하고 환자가 반출 신청을 하면 그때그때 조직 슬라이드를 추가로 만든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암의 완치가 어렵고 재발할 경우 초기의 조직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기간 보관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환자가 재진단, 치료법 변경 등 이유로 병원을 옮길 때에도 병리 슬라이드가 요구된다. 문제는 슬라이드의 양이 많고 오래 보관하다 보니 찾을 때 시간이 걸리는 등 물리적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병원은 환자가 원할 때마다 창고의 방대한 슬라이드 속에서 찾아서 새로 제작해야 한다. 환자 입장에서도 병리 슬라이드 반출을 신청하고 받아가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거나 병원을 재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게다가 반출용 슬라이드 제작에 따른 추가 비용은 오롯이 환자 부담이다. 필요로 하는 슬라이드가 적게는 2~3장, 많으면 20장까지 요구되기도 한다. 추가 비용도 병원 마다 천차만별이다.

6년 전 모 병원에서 난소암 수술을 받은 A씨는 지난해 5월 재발해 다른 대학병원에서 치료받고자 했다. 하지만 옮긴 곳에서 이전 병원에 보관 중인 비염색 조직 슬라이드를 가져오라고 요구해 암환자 카페에 상담 글을 올렸다. A씨는 “발급 비용이 100만원 가까이 드는데 잘못 떼면 다시 해야 돼서 긴급 도움을 요청한다”고 했다. 슬라이드 제작에는 의료기관에 따라 장당 5000~2만원의 비용이 든다.

보관된 슬라이드가 분실 혹은 오염됐을 경우 환자는 조직 검사를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검사 자체는 물론 그에 따른 진단 및 치료 지연도 환자에겐 부담이다. 한 유방외과의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은 B씨는 대학병원에서 유방암 여부를 판정받기 위해 의원에 조직 슬라이드와 블록(덩어리)을 요청해 10일 만에 수령했다. 하지만 대학병원의 분석 소견이 일치하지 않아 조직 슬라이드와 블록 제조를 다시 요청했고 그 바람에 최종 진단과 항암 치료가 한참 늦어졌다. 의무기록이나 영상CD 발급과 달리 병리 슬라이드는 병리과에 직접 방문해 신청, 발급, 반납하는 등 복합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도 불편한 점이다.

안전 측면에서도 문제가 된다. 조직검사 과정이 복잡하고 수작업으로 이뤄지다 보니 소위 사람에 의해 발생되는 오류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코 내부에 생긴 암으로 1년 항암치료 후 뇌척수로 전이된 5세 아들을 뒀다는 C씨는 인터넷 암환자커뮤니티에 남긴 글에서 “조직검사 결과에 의심이 들어 원발 부위의 종양 조직 슬라이드를 요청했으나 분실했다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며 분개했다.

또 암 환자와 정상인의 조직 슬라이드가 바뀌어 정상인이 엉뚱하게 암 수술을 받는 황당한 사고로 의료소송을 벌이는 사례도 뉴스에서 심심찮게 접한다. 대형병원의 경우 매년 수십만 장에 달하는 병리 슬라이드가 만들어지고 보관, 이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실수나 오류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병리 디지털화 시급

전 세계적으로 AI에 기반한 머신러닝 기술이 의료계 곳곳에 적용되고 있다.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AI 기능이 탑재된 다양한 의료 장비들이 속속 도입되고 미국 독일 등에서는 AI를 활용한 기술에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최근 우리 보건복지부도 전체 암 환자의 70%(300만명)를 차지하는 주요 암 10종에 대해 진단부터 사망까지 전주기 진료 정보를 구축하는 ‘K-캔서(Cancer) 통합 빅데이터’ 구축 계획을 밝혔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난해 병리학 분야 AI기반 기술에 대한 건보 수가(병원에 보상하는 대가) 판단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뒤처진 병리 인프라의 디지털화가 먼저라고 촉구한다. 암 치료의 시작 단계인 ‘진단’을 위한 병리 데이터가 확보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병리학회 이연수 이사장은 “디지털 병리는 단순 선택사항이 아닌 AI기반 디지털 병리 진단의 시작을 위한 선결 과제다. 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 인프라 구축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과 서울성모병원, 삼성서울병원 등 몇몇 대형 의료기관의 경우 디지털 병리 시스템을 진료 현장에 일부 도입하고 있으나 아직은 손에 꼽을 정도다.

디지털 병리 인프라가 전국 규모로 구축되려면 국가 차원의 지원이 모색돼야 한다. 환자의 유리 슬라이드를 디지털화해 이미지(영상)로 전달하려면 첨단 스캐너와 운영 프로그램, 엄청난 저장 서버가 필요하고 구축에는 고비용(상급병원 기준 100억원)이 들기 때문이다. 이 이사장은 “현재의 낮은 병리 수가로 디지털 병리 인프라 구축은 요원하다. 디지털 병리 전환 시 병원에 가산 수가를 인정하는 등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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