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장애인 희화화 논란… 안무 바뀔까

입력 2021-05-21 04:04
국립발레단이 2015년 레퍼토리로 만든 존 크랑코 안무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한 장면. 오는 6월 대한민국발레축제 프로그램으로 재공연을 앞둔 가운데 극 중 웃음을 위해 장애인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립발레단 제공

발레 팬 이모씨는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 다음 달 15~20일 공연 예정인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속 일부 장면이 장애인을 비하하고 희화화했다고 진정을 넣었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의 엄마인 이씨는 장애인단체 등에도 공공기관인 국립발레단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혐오적 표현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국립발레단이 2015년 레퍼토리로 만들어 올해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다시 선보이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손꼽히는 희극 발레 중 하나다. 셰익스피어 원작으로 이탈리아 파두아의 부자 밥티스타의 말괄량이 큰딸 카테리나와 얌전한 둘째 딸 비앙카의 결혼 소동을 다뤘다. ‘드라마 발레의 거장’ 존 크랑코가 196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동명 희곡을 2막 발레로 만든 이후 여러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채택됐다.

발레 커뮤니티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은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2막 1장이다. 카테리나와 결혼한 페트루키오는 집에 돌아온 후 아내를 길들이기 위해 밥을 굶긴다. 이때 페트루키오의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으로 카테리나를 괴롭히는데, 뇌성마비나 뇌병변 환자 등 지체장애인의 흉내를 낸다. 원작에선 하인들이 페트루키오의 명령으로 음식을 들고 왔다 치울 뿐이지만 크랑코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넣은 것이다. 2분이 채 안 되는 길이로 그동안은 논란이 된 적이 없지만 최근 예술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해지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크랑코의 3대 드라마 발레 가운데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오네긴’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투어에 이 작품이 많이 포함되지 않았던 데다 2000년대 이후에 라이선스를 허가해서다. 그래서 작품 속 장애인 희화화 문제가 주목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페트루키오가 카테리나를 가학적으로 굴복시키는 내용 때문에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비해 여성혐오를 담은 불편한 대사들이 빠졌고 코미디로서 재미는 극대화됐다는 평가가 많다.

이씨 외에 일부 발레 팬도 국립발레단에 장애인 희화화 문제를 제기한 상태다. 국립발레단은 크랑코 안무의 저작권을 가진 ‘존 크랑코 재단’(John Cranko Gesellschaft eV)에 이 같은 논란을 전하며 해당 장면의 안무 수정 가능 여부를 문의한 상태다.

국립발레단 관계자는 “크랑코가 안무하던 시절에는 인권의식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관객 눈높이에서는 불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강수진 단장님이 크랑코 재단 측과 안무 수정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재단 측에서 어떤 결론을 낼지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