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집트의 10가지 재앙’에는 모세와 이집트 왕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 해방을 두고 펼친 숨 막히는 대결이 묘사돼 있다. 이야기의 악역은 단연 하나님 명을 받든 모세를 거스르고 약자를 압제하다 나라를 패망 직전까지 이끈 이집트 바로다. 흥미로운 건 하나님이 악역인 바로에게도 미세한 음성과 기적으로 자기 뜻을 밝힌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비교적 가벼운 1~5번째 재앙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을 권해도 바로는 거부한다. 이후 재앙의 강도가 점차 세짐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스스로 거절한 셈이다. 바로의 내면을 보여주는 이런 묘사는 죄 된 욕망을 따라 사는 인간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치 역할을 한다. 이야기가 모든 게 선악으로 구별되는 전형적인 서사가 아닌, 복잡다단한 일상에 더 가까워진다.
책은 저자가 이집트의 10가지 재앙을 비롯해 인류 역사에서 흔하게 다룬 모세와 주변 이야기를 이렇듯 개인사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협성대 신학과 교수로 10년간 강의한 김영봉 미국 와싱톤사귐의교회 목사가 지난해 교회에서 한 설교를 토대로 정리했다. “코로나19가 인류를 광야로 내몰았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 인물 중 가장 광야를 오래 경험한 모세의 개인적 이야기를 알아보고 싶었다”는 게 설교 계기였다. 저자는 독일 유대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와 미국 랍비 해럴드 쿠슈너 등의 연구를 뼈대로 삼고 모세 시대의 문화·역사·종교적 배경에다 자신의 경험 등을 덧붙여 그만의 ‘모세 개인사 탐구’를 완성했다.
믿음 성장 희생 정의 역경을 비롯한 ‘인간 모세’의 삶을 관통하는 17가지 키워드를 읽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목적인 만큼, 책에는 오늘날 일상으로 마주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곳곳에 녹아있다. ‘정의’ 주제에서 다룬 인종차별 문제가 대표적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바로는 강제 노역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것으로 응수한다. “이스라엘인은 게을러 핑계를 대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출 5:17)
저자는 여기서 미국의 유색인종 ‘차별의 논리’를 발견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게으르고 똑똑지 못한 사람’ ‘폭력적이고 성욕이 강한 사람’이란 편견이 널리 퍼져있다. 아시아인을 향한 편견 역시 존재한다. ‘원숭이’ 등 외모적 비하 이외에도 모임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등 태도 면의 차별도 적잖다. 최근엔 코로나19를 이유로 아시아인에게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무작정 외치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차별받는 소수자를 ‘편드는 하나님’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어떤 사람도 편견으로 대하지 말고 하나님 형상을 입고 지어진 절대적 존재로 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의 목소리가 돼줘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편드는 분이므로 우리 또한 편드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모세가 40년간 걸은 광야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침도 나온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는 게 어려워진 이 시기엔 예배당을 못 가도 주님과 교제하는 ‘없이 사는 법’을 익혀보자고 권한다. 어차피 인생엔 한 번쯤 질병과 장애 등으로 교회에 가기 힘든 시절이 오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재의 고난 속에선 신앙을 ‘보험’이 아닌 ‘모험’으로 여기자고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에 맡기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자”는 것이다.
모세를 십계명 돌판을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짓는 ‘시내산 산신령’이 아닌 ‘한 인간’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는 우리처럼 약점 많았던 모세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자로 꼽히는 건 그의 “온갖 부족한 점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세가 40년의 고된 여정을 완주할 수 있던 이유는 믿음에 근거한 겸손함과 온유함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영적 자원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