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 서종면 문호리 서용선(70) 화가의 자택 작업실은 5월의 신록으로 눈부셨다. 1000평 대지엔 작업실 2개, 살림집 1개, 창고 1개 등 건물이 몇 채나 됐다. 자연에 반해 이곳에 왔나 싶을 정도로 야생의 환경이 주변에 함께했다. 마당 옆으론 개울이 흘렀고 이웃집에선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14일 작업실 앞 벚나무 아래 탁자에 앉아서 인터뷰할 때도 닭 울음소리가 수시로 들려왔다. 닭끼리 싸우는 소리는 오랜만에 듣는 것이어서 유년시절 외갓집 추억까지 흔들어 일깨웠다.
1995년 그가 양평으로 이사 오기로 선뜻 결정한 것도 자연에 매료돼서였을까. “맞아요.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끼고 올라오는 풍경에 반해 한번 보고 정한 집터였죠.”
전업 작가가 아닌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할 때였다. 보직을 맡았을 때는 주중 매일 양평과 서울을 오가며 출퇴근해야 했다. 그런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풍경이 준 매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서울에선 큰 캔버스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얻기가 힘들었어요. 100호(162×130㎝) 정도야 서울에서도 가능하지만, 200호 이상을 하려면 무리였거든요.”
90년대 초반 미국 여행을 하며 농가를 개조한 외국 작가들의 작업실을 보고 적은 비용으로도 교외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양평 시대’를 연 덕분에 그는 가로 7∼8m가 넘는 1000호, 2000호짜리 초대형 유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교실 4개는 턴 것 같은 작업실은 천장 높이가 9m는 됐다. 아파트 3개 층을 턴 높이이기에 가능한 작업이 이곳에서 나왔다.
계유정난 동학혁명 6·25전쟁 등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표현주의적 형상과 강렬한 원색에 담은 역사화, 시선을 당대 역사로 옮긴 세월호와 도시 그림 등이 이곳 양평 작업실에서 탄생했다. 이때의 작업 대부분이 2015년 금호미술관 7개 전시실 전관, 학고재 갤러리 본관을 채운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전에 나왔다. 당시 관람객들은 작업 규모에 압도됐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니 한국 미술이 건축의 제한을 많아 받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을 가보면 건축물 천장이 아주 높아요. 창고를 지어도 천장이 높지요. 교회 등 다중이 모이는 공간은 아주 높고 커요. 거기에 미술 작품이 들어가며 공공예술 탄생으로 이어지더라고요. 로마 바티칸의 시스틴 천장화가 한국에서는 나올 수 없는 구조죠. 건축이 작품의 형식을 규정하고, 작품 구상까지 좌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양평에서 창작욕이 가지를 뻗어가던 2008년의 어느 날, 그는 그리고 싶을 때 맘껏 그리고 싶다며 서울대 미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정년을 10년이나 남겨둔 시점이었다. 서용선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태어났다. 60년대 말 고교 시절을 정릉 달동네에서 보냈다.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닌 탓인지 제때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제대 후 막막했던 74년, 중동에 건설노동자로 가겠다며 중장비학원을 알아보려고 신문을 뒤적이다 이중섭·박수근의 생애와 예술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됐다. 만화를 잘 그렸던 그는 화가가 되고 싶어졌다.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고 모교 교수까지 됐다.
“교수 시절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게 하나 있어요. 학생들한테 어떤 작업을 할지, 즉 작업 내용만이 아니라 작업 하는 조건도 가르쳤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컨대, 캐나다에 갔더니 어떤 대학에선 미대 학생들에게 직접 작업실을 꾸며보라는 과제를 내더라고요. 작가에게 작업공간은 절대적입니다. 작업실을 어떻게 꾸미느냐가 그 작가 스타일이거든요.”
흥미로운 건 양평에 넓고 천장 높은 대형 작업실을 가진 그가 ‘노매드’(유목민)처럼 세계를 돌며 작업하기를 즐긴다는 사실이다. 지난해에도 코로나19가 극심해지던 미국 뉴욕에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했다. 대학교수 시절에도 2∼3년 단위로 외국을 다녔지만, 전업 작가가 된 후로는 거의 1년에 한 번은 해외로 나간다. 미국 뉴욕과 워싱턴DC, 독일 베를린, 호주 맬버른, 중국 베이징 등 세계 주요 도시를 떠돌며 지하철과 버스, 거리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을 그린다.
1995년의 경험이 컸다. 당시 미국 버몬트 주의 작은 도시에서 운영하는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청받았다. 한국에는 레지던시가 도입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언어적 장벽 앞에 막막했던 그는 뭘 할까 고민에 빠졌다. 빈 작업실에 마침 거울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목탄 하나를 사서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화상은 인간을 연구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가 그린 드로잉은 단숨에 그은 굵은 선 몇 개로 신체를 표현한다. 형태가 아니라 기운을 표현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선(線)의 작가’로도 불린다. 이때부터 시작한 자화상 드로잉 시리즈는 2016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연 개인전 ‘확장하는 선, 서용선 드로잉’에 선보였다. 드로잉은 유화로 ‘번안’돼 서용선 특유의 붉은색, 초록색, 노란색 등 원색 대비가 강렬한 선의 터치로 형상화한 자화상 시리즈로 확장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에겐 침대 하나 놔두면 그게 사는 집이 돼요. 그러니 어느 도시에서나 작업하는 공간이 확보되면 여기나 저기나 다 같아요. 작가에겐 사는 집이 클 필요가 없지요. 여기 양평 올 때도 작업실은 작품을 보관하는 장소 정도로 생각했어요. 작업은 어디 가서든 할 수 있으니까요.”
노매드적 작업 방식은 시야를 틔워준다. 그의 캔버스에는 외국의 도시 풍경과 그 속에 사는 외국인들도 등장한다. “한국 사람이 외국인을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우리가 그만큼 배타적이에요. 저만해도 외국 사람을 도시 풍경 속에는 그려 넣지만, 외국인의 초상 자체를 그리는 건 아직 주저되거든요. 노매드라는 개념은 자기중심을 벗어나 시야를 넓히는 것, 국가주의적 사고가 갖는 폐쇄성에서 벗어나는 것 아닐까요.”
작업실에는 그가 외국에서 시작해 한국에서 완성 중인 자화상 시리즈들이 마지막 터치를 기다리듯 펼쳐져 있었다. 그는 자화상 연작을 모아 부산의 갤러리하이에서 29일부터 자화상 전을 연다. 경기도 여주미술관에서는 지난 2월 말부터 역사화, 풍경화, 도시 그림들을 선보이는 ‘만첩산중 서용선’전을 하고 있다.
양평=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