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아름(39·여)씨는 유제품과 해산물은 먹지만 동물 고기는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 ‘페스코’다. 가축의 대량 사육과 이로 인한 환경 오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결심한 뒤 1년 전부터 돼지와 소 닭 오리 등 이른바 ‘육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는 최근 인터넷 쇼핑으로 산 운동화에 소가죽이 들어간 것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그간의 노력이 허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채식 커뮤니티에는 김씨와 같은 고민을 하는 채식주의자들이 생각보다 많다. 동물 가죽으로 만든 물건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회원 1만명이 넘는 커뮤니티에 재질 표기가 명확하지 않아 구두 사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이 올라오자, 이에 공감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 커뮤니티에서는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가 소가죽과 비슷한 식물 재질의 가방을 만들었다는 뉴스에 “어디서 살 수 있냐”며 반색하는 반응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내 “국내에서 사긴 어렵다”는 걸 확인하고 하나같이 아쉬워하기도 했다.
꼭 채식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비건 패션(Vegan fashion)에 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이는 구하기 어렵거나 돈을 더 써야 해도 자신의 가치관에 맞춰 물건을 사는 ‘미닝 아웃(Meaning out)’ 소비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을 겪으면서 대규모 자연파괴와 기후 변화에 대한 각성이 이 같은 관심에 한몫했다는 평가도 있다.
비건 패션은 동물성 소재 대신 세포 배양이나 식물 성분 등 천연 소재에 비독성 화학물질을 첨가해 만드는 것이 기본이다. 간혹 패션계에서 석유계 화합물로 만든 가죽이나 인조털을 비건 패션으로 소개하지만, 이는 틀린 설명이다. 이런 소재의 제품은 동물 가죽을 입지 않는다는 죄책감만 덜어줄 뿐, 환경 보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중의 비건 패션 제품은 개발 단계에 있거나, 제작하더라도 소규모 생산인 경우가 많다. 그래도 동물성 소재를 대체할 만한 것이 아예 없던 시절에 비하면 현재 상황은 진일보한 편이다. 세계적인 브랜드 회사들도 비건 패션 제품 출시를 시도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지난 3월, 버섯 균사체를 활용해 만든 가죽으로 빅토리아 백을 제작해 올해 안에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에르메스가 선택한 것은 미국 스타트업 마이코워크스가 개발한 버섯 가죽 실바니아다. 이 회사는 실이나 솜털, 뿌리와 비슷한 형태를 한 버섯의 몸체인 균사체를 이용해 촉감은 물론 내구성도 동물 가족과 비슷한 소재를 탄생시켰다. 에르메스는 이 실바니아를 3년간 독점 사용키로 했다.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는 또 다른 버섯 가죽 ‘마일로’로 만든 운동화 스탠 스미스를 1년 내 출시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대체 가죽이라고 하면 품질이 낮을 것이라는 인식이 많다. 이 같은 소비자의 우려에 대해 아디다스 측은 미국 현지 IT매체 엔가제트에 “소비자가 시장에 나오길 기대하지 않는 제품을 계속 만들진 않을 것”이라며 자부했다. 패션 브랜드 스텔라 매카트니도 아디다스가 사용한 버섯 가죽을 이용해 상·하의 한 벌씩을 제작, 2021 봄여름 컬렉션으로 선보였다.
고가의 브랜드와 달리 패션 브랜드 H&M은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으로 소비자 접근성을 높였다. 식물성 피마자 오일로 제작된 바이오 기반 섬유가 90%가량 들어간 옷은 5만~6만원선, 선인장 가죽으로 만든 샌들은 14만원대에 내놨다. 지난 3월 출시된 ‘사이언스 스토리’라는 제품군은 5월 말 현재 공식 홈페이지에서 대부분 품절됐다. H&M 관계자는 20일 “무게나 신축성, 통기성 등 품질에서 합성 섬유나 동물 가죽보다 뒤지지 않아 인기가 좋았다”고 전했다.
시계·가방 등 동물 가죽 제품으로 유명한 파슬도 지난달 초 선인장 가죽 가방을 내놨다. 파슬 측은 “비건 가죽이 일반 가죽과 같은 내구성 기준을 충족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포도, 사과, 감귤의 부산물이나 파인애플 잎, 고구마로 만든 식물 원사도 ‘앤아더스토리’ ‘타미힐피거’ 등 대형 패션 기업이 사용하고 있다.
영화제 등 이목을 끄는 행사에서 비건 패션을 고수하는 ‘레드 카펫 그린 드레스’ 운동도 펼쳐지고 있다. 지난달 25일 열린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사회자인 마리 매트린은 패션 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텐셀 럭스 드레스를 입었다. 텐셀 럭스 필라멘트사는 나무에서 추출한 식물성 원사로 누에고치에서 뽑아야 하는 실크의 대체품이다. 텐셀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렌징 측은 “패션이 세계에서 가장 큰 공해를 유발하는 산업 중 하나”라면서 “친환경적 미래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동물 세포를 이용한 배양 가죽은 현재 연구 단계에 있지만 전도유망한 분야로 꼽힌다. 배양육 제작사인 미국 기업 모던 미도는 배양 가죽을 상업적 규모로 성장시키기 위해 1억3000만 달러(1475억원) 규모의 투자금을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앞으로 6~9개월 내 패션 브랜드 등과의 협업을 발표할 것”이라고 영국 패션 웹사이트 비즈니스 오브 패션에 밝혔다. 배양육에 대한 책 ‘클린 미트’의 저자이자, 미국 동물보호협회 부회장과 대변인을 지낸 폴 사피로는 가죽은 고기보다 여러 규제와 소비자 인식 측면에서 진입 장벽이 낮아서 패션 산업에서의 발전이 세포 배양 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이 상당하다고 진단했다.
반면 나날이 발전하는 해외 사례와 달리 국내 비건 패션 산업은 걸음마 수준이다. 특히 동물 가죽을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한 한국에서 대체 가죽 시장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시장 조사 기업 인피니움 글로벌 리서치에 따르면 2019년에서 2025년 불과 6년 사이 세계 비건 가죽 시장은 50%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에서 버섯 가죽을 연구하는 조선대 생명화학고분자공학과 신현재 교수는 “동물 가죽 산업이 전무한 한국이지만 비건 가죽 시장은 새로운 기술로 판도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며 브라운관 기술을 장악한 일본 기업 소니를 상대로 삼성·LG가 LED 등 새로운 기술로 세계 TV 시장 주도권을 뺏은 사례를 언급했다. 신 교수는 “비건 가죽에 대한 대중 인식 변화가 필요한 때”라면서 예술계와 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학자가 비건 가죽의 유용성을 알리는 것보단 그 가죽으로 만든 예술 작품, 멋진 가방이 더 큰 파급력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학계의 적극적인 연구와 정부 지원 등 관심도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