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건강] 시도 때도 없이 몸 특정 부위가 퉁퉁… 대 잇는 끔찍한 고통

입력 2021-05-18 04:03
몸 속 염증 조절 단백질 부족 원인
얼굴 배 등 갑자기 붓는 발작 부종
진단 늦고 기도 부으면 사망 위험
데이터도 전무… 국내 1000명 추정
건보 혜택받지만 응급 처방 2회 뿐
조기 진단·지원 대상 확대 목소리

창원에 사는 40대 여성 A씨는 늘 큰 병원 주변으로만 이사를 다녔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응급실을 드나들었던 그녀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겨울, A씨는 처음으로 상상 못할 경험을 했다. 갑자기 얼굴과 입술이 퉁퉁 붓고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았다. 목구멍이 부어 숨쉬기 힘들고 심한 복통이 찾아왔다. 이후 언제 어디서 응급상황이 닥칠지 몰라 병원 가까이에서 살아야 했다. 응급실에 갈 때마다 진단은 달라졌다. 처음엔 콩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했고 알레르기 검사도 여러 차례 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유전성 혈관부종은 기도나 얼굴, 복부 등이 갑자기 부어오르는 특징이 있다. 기도에 부종이 생기면 숨쉬기 힘들어지거나(왼쪽) 얼굴이 퉁퉁 부어 눈을 뜨기 어려울 때도 많다. 셔터스톡, 미국 유전성혈관부종협회 제공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결혼 후 아들이 태어났다. A씨는 서른이 넘어서야 자신의 병이 ‘유전성 혈관부종’이란 걸 알게 됐다. 안타깝게 그녀의 아들도 4살 되던 해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손·발이 부어 오르는 증상은 청소년기가 다가오자 점차 빈도가 잦아졌다. 심각할 땐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까지 생겼다. 아이는 학교에서 조퇴하는 날이 많아졌고 소풍이나 여행 등 엄마와 떨어져 먼 곳에 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큰 고통은 그런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A씨는 “결혼이나 아이를 낳기 전에 병을 알게 됐다면 내 선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결혼이나 출산을 앞둔 대부분의 환우들이 같은 고민을 한다”고 털어놨다.

유전성 혈관부종은 몸 속 염증을 조절하는 단백질이 결핍되거나 기능이 떨어져 발생하는 희귀질환이다. 얼굴과 입술 손 발 소화기관(위장) 호흡기 등 여러 부위에 부종 형태로 나타난다. 갑작스럽게 온 몸이 부어 오르기 때문에 ‘발작성 부종’이라고 부른다. 일반 혈관부종과 차이는 가려움증을 동반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위장관이 부으면 배가 튀어나오고 심한 복통이 동반된다. 미국 유전성혈관부종협회 제공

환자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굴이 벌에 쏘인 것처럼 심하게 붓고 출산 때나 느끼는 복통을 매 순간 겪는다. 이보다 더한 것은 언제 급성 발작이 시작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특히 기도나 복부에 부종이 나타나는 경우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극에 달한다. 위장 점막이 부으면 장폐색으로 장이 괴사될 수 있다. 기도의 부종으로 입과 목 안쪽이 부어 오르면 호흡곤란이 오거나 질식에 의한 사망 가능성도 높아진다. 실제 환자 가족 중에 호흡곤란이나 장폐색으로 사망한 사례도 있다.

서울대병원 알레르기내과 강혜련 교수는 17일 “유전성 혈관부종은 인구 5만~10만명 당 1명꼴로 발병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아직 유병률 조사조차 안돼 있지만 해외 유병률을 대입해 보면 약 1000명의 환자가 있을 걸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발표 자료를 보면 고작 91명이 이 질환으로 진료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즉 여전히 정확한 병명조차 모른 채 갑자기 몸이 붓는 고통을 겪고 있을 ‘숨은 환자들’이 900명 넘게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유전성 혈관부종은 부모 중 1명에게 유전적 변이가 있는 경우 자녀의 발병 확률이 50%에 이르는 데다 세대를 거르지 않고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부모에 해당되는 성인 환자가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녀 세대에서 증상이 발생한 후 진단을 받기도 해, 미진단 환자들의 대다수는 가족 단위로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어떤 환자는 가족과 친지 내에 20여명이 같은 병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효과적인 치료제가 없던 이들에게 2018년 급성 발작을 가라앉히는 응급치료제(주사제)가 처음 나와 희망을 던져줬다. 인슐린처럼 스스로 투여할 수 있어 가정이나 직장에서 촌각을 다투는 긴급상황이 발생해도 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건강보험이 적용돼 부담도 덜었다.

또 희귀난치성질환 산정특례 대상으로 지정돼 본인부담금 10%만 약값으로 내면 된다. 지난 3월부터는 응급치료 목적으로 보유, 투여할 수 있는 응급치료제 수량이 기존 1회분에서 2회분까지 확대됐다. 유전성 혈관부종 환자들은 1차 급성 발작 후에 추가 발작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이번 보험 확대를 통해 환자와 가족들이 보다 안심하고 병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강 교수는 “일반적인 알레르기나 위장 질환과 증상이 비슷하고 질병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아 정확한 진단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다. 이 때문에 새로운 치료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빠른 진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치료제가 있어도 쓰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며 “원인 불명의 얼굴 부종, 후두부(목안) 부종, 구토, 복통, 설사 등의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유전성 혈관부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혈액검사를 통해 정확하고 빠르게 진단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환자들은 치료 환경이 크게 나아졌지만 여전히 개선돼야 할 점이 있다고 말한다. 환자마다 급성발작이 발생하는 주기, 횟수가 달라 응급치료제 2회분 급여 처방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민수진 유전성혈관부종환우회 회장은 “증상이 2~3개월에 한번 발생하는 환자도 있고 일주일에 3~4회 이상 심각한 급성 발작이 찾아오는 환자도 있기 때문에 증상이 자주 나타나는 환자들은 2회분 급여 처방만으로는 부족해 환자 상황에 따른 처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의 경우 호주에선 이 응급의약품의 급여 처방을 최대 12회까지, 캐나다 일부 주에선 연간 최대 24회 지원을 인정하고 있다.

또 정부의 의료비지원 대상 선정 기준(소득 및 재산 수준)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혜택을 받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때문에 현재 단 한 가정만 의료비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 회장은 “병명에 ‘유전성’이라는 단어가 질병의 조기 진단에 다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며 “환자 중에는 직계가족뿐 아니라 일가 친인척까지 한 번에 진단되는 경우도 있는데, 유전병이란 점 때문에 가족에게 알리지 못하거나 아예 치료 자체를 포기하고 숨어버리는 환자들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또 “유전성 희귀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으면 한다”는 바람도 나타냈다. 환우회는 지난 16일 ‘세계 유전성 혈관부종의 날’을 맞아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And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