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 17개월 국회청원 “문턱 더 낮추고 책임성 높여야”

입력 2021-05-15 04:04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시행 17개월째를 맞았지만, 당초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일정 요건(30일간 10만명 이상 동의)만 갖추면 국회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국민의 청원권을 보장하겠다는 취지였지만, 높은 문턱과 국회의 무관심으로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일보가 14일 국민동의청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21대 국회에서 10만명 이상 동의 요건을 충족해 국회 상임위에 올라온 청원 11건 중 처리된 청원은 3건에 불과하다. 나머지 안건은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시민단체들은 현행 기준을 ‘90일간 5만명 이상 동의’로 완화하고, 국회가 기존 심사 관행에서 탈피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적 여론 환기 일부에 그쳐

국민동의청원은 지난해 1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청원심사규칙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창구로 활용되면서 국회에서도 국민의 청원권을 보장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반영된 것이었다.

국민동의청원은 시행 초기였던 지난해 상반기 ‘n번방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면서 주목받았다. 당초 정치권은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이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고, 국민일보 보도를 통해 사회적 논란이 확산되자 부랴부랴 방지대책을 논의했다. 이후 지난해 4월 인터넷 사업자가 불법 촬영물 유통 방지를 의무화하는 ‘n번방 방지법’과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 등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국민동의청원이 출발점이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올린 청원을 시작으로 여론이 불붙었다. 당시 검찰개혁을 둘러싼 여야 대치 상황에서도 산업재해를 기업의 범법행위로 규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청원과 입법과의 괴리 커

문제는 국민적 관심이 촉발된 사안 이외 대부분 청원은 국회 입법의 높은 문턱을 실감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21대 국회에서 30일 이내 10만명 이상 동의를 얻은 국민동의청원 11건 가운데 입법 심사대에 오른 청원은 단 3건에 불과하다. 모든 노동자에 대해 근로기준법 적용 및 노조활동 보장, 공무원과 교원의 정치기본권 보장 등 다른 8건은 여전히 해당 상임위에 계류 중이지만 법안심사소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찬반 양론이 팽팽한 사안이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동의청원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입법 과정에서 국민동의청원의 당초 취지와 맞지 않는 시행착오가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는 ‘n번방 사건’ 해결을 촉구하는 청원 논의 단계에서 디지털 성범죄 관련 경찰의 국제공조수사와 2차 가해 방지 등 종합대책보다 기존에 발의된 ‘딥페이크’(동영상에 타인의 얼굴 합성) 처벌 강화법안만 처리해 관련 단체들이 비판성명을 내기도 했다.

다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현실적 어려움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서복경 서강대 연구교수는 “내용이 비슷한 법안이 발의되면 ‘패키지 심사’를 하는 국회의 심의 관행도 영향이 있다”며 “당초 청원의 취지가 국회 입법과정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됐는지는 상임위로 넘어간 청원 수보다는 개별 회의록을 분석해 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높은 문턱 낮춰야


시민단체들은 국민동의청원 성립요건의 문턱을 낮춰야 당초 취지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인 실명인증 방식이어서 청원 동의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30일간 10만명 요건을 달성하기 까다롭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청원 2121건 가운데 10만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은 17건으로 성립비율이 0.8%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현행 청원심사규칙상 ‘30일 이내 10만명 이상 동의’ 기준을 ‘90일 이내 5만명 이상 동의’로 낮추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서 연구교수는 “현재 규정은 조직된 집단이 아니면 성립요건을 달성하기 어렵다”며 “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해외 선진국들은 국민동의청원과 유사한 형태의 전자입법청원 문턱을 낮춰 일정 요건만 충족하면 시민들의 정책 제안을 국회가 의무적으로 심사토록 하고 있다. 독일 연방의회는 4주간 5만명 이상 동의를 얻으면 청원위원회 공개회의에서 논의하도록 하고, 영국도 10만명 이상 서명을 받으면 반드시 하원 본회의에서 논의해야 한다. 핀란드는 6개월 이내 5만명 이상 서명을 받으면 의회에 법률안으로 접수된다.

한 국회 관계자는 “국민동의청원 제도의 실효성은 쟁점법안 심사를 꺼리거나 주요 법안이 아니면 집중도가 떨어지는 국회 운영상의 문제와 긴밀히 얽혀 있다”며 “n번방 방지법 사례처럼 국회 입법을 촉구하는 국민적 관심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