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업자는 특혜 펑펑… 전세입자는 보증금 뜯겨도 발만 동동

입력 2021-05-12 00:05

8채, 76채, 159채, 148채, 155채, 45채. 국민일보가 1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실로부터 입수한 임대사업자 진모(48)씨의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연도별 신규 취득 임대주택 현황이다. 진씨는 2019년 기준 등록된 임대주택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진씨가 소유한 임대주택은 정부 정책과 맞물리면서 크게 불었다. 서민 주거안정 등을 목표로 민간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이 확대되던 2014년 진씨는 처음으로 서울 강서구청에 임대사업자 등록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후 강서·양천구의 다세대주택과 오피스텔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2017년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이후 진씨 소유의 임대주택 증가 속도는 더욱 가팔라졌다. 문재인정부가 취득세 감면 등 임대사업자에 대한 혜택을 강화하면서 주택 보유가 더욱 손쉬워졌기 때문이다.

제도 빈틈 파고든 ‘전세 사기’ 생태계

박근혜·문재인정부가 임대사업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전국의 등록 임대주택은 2016년 79만채에서 지난해 1분기 156만채로 급증했다. 지난해 6월 기준 등록 임대주택을 100채 이상 보유한 ‘큰손 임대사업자’는 199명이고, 이들이 보유한 주택은 3만6066채에 달했다. 1명당 평균 181채를 보유한 셈이다.

등록 임대주택의 가파른 증가는 서민 주거 공급이라는 본래 목적과 다른 ‘깡통 전세’ 양산이라는 뜻밖의 위험을 잉태했다. 임대주택 급증 이후 임대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SGI서울보증에 접수된 보증금 미반환 사고 현황은 2017년 273건을 기록한 이후 지난해 3251건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사고 금액이 6468억원에 달하고, 누적 사고 금액은 1조5000억원을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악성 임대사업자들이 혼란한 부동산 시장과 제도의 빈틈을 파고들어 새로운 ‘전세 사기’ 생태계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서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신축 빌라의 전세 수요가 꾸준한 상황에서 세제 혜택이 더해지자 임대사업자 입장에선 임대주택을 더욱 손쉽게 늘릴 수 있게 됐다. 2년 뒤 보증금 반환 가능성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고, 임대주택을 수백채씩 보유해도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한 위험부담은 고스란히 세입자들이 떠안았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더라고 이를 규제할 수 있는 실효적인 방안이 없다는 점이다. 형사 고소를 해도 사기 혐의를 입증하기 쉽지 않고, 민사소송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으려 해도 적잖은 시일이 소요된다. 이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해당 매물을 직접 매수하는 경우도 많다. 한 피해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그냥 집을 사버렸다”고 토로했다. 전세 사기 수사 경험이 있는 한 경찰 관계자는 “건축업자, 공인중개사, 악성 임대사업자들이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힘없는 서민들의 전세자금만 쏙 빨아들인 대형 사기극”이라고 규정했다.

공개 못하는 ‘블랙리스트’ 100여명


국토교통부는 임대사업자들의 전세 사기가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자 지난해 7월 보증보험 가입 의무화라는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 역시 보증금 미반환 사고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지난해 8월 이후 신규 등록한 임대사업자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기존 임대사업자의 매물은 오는 8월 이후 적용된다.

기존 세입자들이 보증보험에 뒤늦게 가입해도 장벽이 많다. 특히 이미 보증사고가 누적돼 이른바 ‘블랙리스트’(집중관리대상)에 오른 집주인 매물은 보증보험에 가입할 수조차 없다. 주택도시보증공사 관계자는 “미반환 사고가 누적됐거나 상환 의지가 없는 약 100여명의 집 주인을 집중관리대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며 “더 이상 상환 능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집중관리대상 소유의 주택은 보증보험 신규 가입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고 설명했다.

HUG가 블랙리스트로 별도 관리하고 있음에도 세입자는 악성 임대사업자에 대한 정보를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국토부와 HUG는 국회에 “신용정보보호법 등에 따라 블랙리스트 임대인의 정보 공개는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신축 빌라를 중심으로 보증금 미반환 사건이 잇따라 불거지는 지금도 세입자들은 악성 임대사업자들이 내놓은 매물인지 모른 채 전세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것이다. 세입자들은 전세 기간이 만료될 즈음 보증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걸 뒤늦게 알 수밖에 없다. 소 의원실은 전국에 터지지 않은 ‘불량 전세 피해금’ 폭탄이 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당, ‘나쁜 임대사업자’ 공개법 발의

국회에서 꾸준히 보증금 미반환 사고 문제를 지적해 온 소 의원은 지난 6일 악성 임대사업자의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의 민간임대주택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와 관련한 해외 사례도 있다. 영국 런던시는 2017년 ‘나쁜 임대인 공개제도’를 도입해 임대인과 중개사들에게 필요한 사전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임대 관련 법률 위반 이력이나 안전조치 의무 위반 등의 이력을 사전에 세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도입 당시 거짓 제보 우려 등이 제기됐지만 행정기관이 관련 서류를 검토하기 때문에 악용 사례는 크게 발생하지 않고 있다.

소 의원은 전세 사기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보증금을 상습적으로 혹은 고의적으로 돌려주지 않는 임대사업자에게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도 지난해 발의했다. 그는 “나쁜 임대사업자에 대한 정보 공개와 형사처벌 조치가 동시에 이뤄져야 공정한 시장질서를 해치는 전세 사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판 박장군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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