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가뒷담] “우리 어르신은 고급차 타셔야 합니다”

입력 2021-05-12 04:07

정부가 대기오염 방지를 위해 공공부문 저공해차 의무구매제도를 도입했음에도 정작 이를 비웃는 정부 부처가 적잖다. 저공해차란 수소·전기차나 액화석유가스(LPG)차, 경차처럼 대기오염물질 배출량이 적은 차다. 지난해부터 관용차는 100% 저공해차로만 구매하도록 법을 바꿨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와 검찰청, 법원행정처, 국회사무처, 선거관리위원회, 통일부는 법을 심각한 수준으로 지키지 않았다. 마치 “우리 어르신은 이런 거 못 타요”라고 시위라도 하는 모양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는 지난해 행정·공공기관의 저공해차 구매 실적을 11일 발표했다. 의무구매 대상 기관 609곳을 전수 조사한 결과 100%로 바뀐 규정을 지키지 않은 곳이 187곳이었다. 정부 부처를 포함한 17곳의 국가기관도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친환경차가 ‘의전용’으로는 부족해 보인다는 인식이 상당수 부처 및 공공기관에 녹아 있는 셈이다.

이 중 특히 죄질이 나쁜 곳으로 8곳이 꼽힌다. 구매한 신차 중 저공해차 비율이 60%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들이다. 비포장도로인 산길을 오가야 하는 특성 상 저공해차 구매가 힘든 산림청(11.8%)이나 오지에 부대가 있는 국방부(50.0%)는 그나마 이해가 간다. 하지만 현장을 달릴 필요가 없는 국회사무처(27.8%)나 선관위(47.2%)의 구매 비율이 떨어지는 점은 마뜩한 설명을 찾기가 어렵다. 법을 엄격히 준수해야 할 법원행정처(18.8%)나 헌법재판소(33.3%), 검찰청(34.0%)의 비율 역시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법무부가 지난해 구매한 신차 중 97.1%가 저공해차였다는 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다. 산업부·환경부는 위반 시 벌칙인 300만원 이하 과태료를 120곳에 부과한다고 밝혔다. 이 명단에 17곳의 국가기관은 없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