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서울 양천·강서구 일대 400채에 육박하는 임대주택을 소유하면서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은 세 모녀를 수사 중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빌라 세입자들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국민일보 5월 10일자 1면 참조). 수백채의 임대주택을 소유하면서 전세금을 미반환하는 사례가 되풀이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처벌은 쉽지 않다. 2019년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에서 최소 283채의 주택을 보유하면서 수십 건의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은 강모(53)씨 역시 검찰에 넘겨졌지만 8개월 넘게 기소 여부조차 결정되지 않고 있다.
가해자는 빌딩 짓고 대형 로펌 선임
“나서도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지쳐 있었다.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 등 법적 대응도 힘들지만, 가해자에게 죄를 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서울 강서경찰서는 지난해 8월 임대사업자 강씨와 공범인 공인중개사 조모씨를 입건해 사기 혐의와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 등을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서울남부지검에 송치했다. 이들도 ‘세 모녀’처럼 시세를 알기 어려운 신축 빌라를 중심으로 전세를 놓은 후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동안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발생해도 경찰이 사기 혐의를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임대인 대부분이 “돌려주려고 했지만 집값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해명했기 때문이다. 판례도 없어 법리 구성이 쉽지 않다. 강서서는 강씨와 조씨가 공범 관계임을 밝혀내 송치했다. 부동산 제도를 잘 아는 공인중개사가 임대사업자로 이름을 올릴 ‘바지 사장’을 구해 앉혀두고 2년 뒤 전세 계약이 만료된 시점에 폭탄을 떠넘겼다고 보고 있다. 이는 전국에서 전세 사기로 입건된 첫 사례다.
윤병운 강서서 경위는 10일 “이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수법’으로 자리 잡을 것 같았다”며 “피해자들이 대부분 사회 초년생이라는 점, 전세 제도의 근간을 흔든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적인 범죄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8개월이 지나도록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남부지검 관계자는 “사건을 검토 중”이라고만 답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거산의 신중권 변호사는 “검찰에서 (경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하라고 하더니 몇 달째 수사가 지지부진한 상태”라며 “피해자들이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다”고 전했다. 추가로 형사고발을 준비 중이던 피해자들은 수사가 더디게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포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애초 임대인이 보증금을 가로챌 의도가 있었는지 판단하기 어렵고, 집값 변동으로 보증금 반환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아 사기 혐의 적용이 쉽지 않다. 실제 2019년 경기도 화성 동탄신도시 아파트 10여채의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피소된 A씨가 그랬다. 당시 세입자를 대리했던 김학무 변호사는 “고소할 시점에는 집값이 떨어져서 임씨를 ‘사기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런데 집값이 크게 오르면서 임씨가 보증금을 돌려주고 ‘부동산 투자의 귀재’가 됐다”고 말했다. A씨는 집값이 오르면서 보증금을 돌려줬고 세입자들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검찰도 지난해 A씨의 사기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반면 강씨나 세 모녀가 소유한 임대주택은 아파트가 아닌 소형 빌라와 다세대 주택에 집중돼 있다. 시세 상승 가능성이 높지 않아 A씨와 같은 ‘반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해자들에 관한 소식은 피해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경찰이 사실상 주범으로 보고 있는 공인중개사 조씨는 현재 자취를 감췄지만 부동산 관련 일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쫓고 있는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서울 강남 일대에서 건물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조씨는 5대 대형 로펌 변호사까지 선임해 법적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로펌에 조씨의 입장을 물었지만 로펌 측은 취재를 거절했다.
‘처벌’보다 보증금 ‘반환’ 원해
처벌이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피해자들은 대부분 처벌보다 피해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서울 강서구 일대에서 전세사기를 저지른 김모(41)씨 피해자들 역시 민사소송인 보증금 반환 소송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우선 집주인에게 임대차계약이 종료됐다는 내용증명을 보내야 하는데, 전세 사기를 벌인 집주인은 잠적한 상태여서 연락이 닿기 힘들다. 법원 게시판이나 관보 등에 내용을 게재해 상대에게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공시송달을 할 수밖에 없다. ‘전세 계약이 종료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만 수개월이 소요되는 것이다.
경매로 보증금을 돌려받으려 해도 피해 금액을 온전히 돌려받기 힘들다. 소형 빌라의 경우 아파트보다 낙찰가율이 낮다. 시세의 60~70% 수준이나 그 이하에서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분쟁이 있는 매물은 입찰 자체가 이뤄지지 않아 유찰되는 경우도 잦다.
피해는 고스란히 세입자들 몫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보증금 대신 빌라 소유권을 떠안는 세입자들도 있다. 아파트 청약을 노리고 빌라에 거주하던 세입자들 입장에선 회복하기 힘든 손해다. 윤 경위는 “청약만 바라보고 사는 사회 초년생들이 전세 사기 피해로 청약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가해자들 상당수가 세금 체납 등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보증금 반환까지는 더욱 험난하다. 이들이 보유한 수백 채 빌라에는 국세청,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으로부터 중복 가압류가 걸려 있어 매매가 되지 않는다. 지난해 기준 HUG가 전세보증금 미반환사고로 압류한 주택은 서울 489채를 포함해 705채에 달한다.
피해자들이 돌려받지 못한 전세금에는 주거 취약계층의 땀과 눈물이 묻어 있다. 강서구 전세사기 피해자 중 한 명은 “‘부부가 첫 출발을 하고, 청년 세대가 ‘부모 찬스(도움)’ 없이 처음 독립할 수 있는 주택인 소형 빌라에서 피해가 발생했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형민 신용일 기자 gilels@kmib.co.kr
[당신의 전세금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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