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과 대화하며 많이 느껴… 나도 힐링 된다”

입력 2021-05-11 04:06

“친구 부탁으로 시작했지만 학생들로부터 얻는 게 많아요.”

경북 경주의 선덕여고에서 ‘영화의 이해’ 수업을 맡은 엄주영(사진) ㈜씨네주 대표는 지난 8일 인터뷰에서 “대학 동기인 선덕여고 류봉균 선생님 때문에 학교 수업을 시작하게 됐다”며 웃었다. 열정적인 교사 친구에게 낚였다는 투였다. 엄 대표는 영화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제작자다.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을 다룬 ‘아이들’부터 스릴러인 ‘핸드폰’ ‘반드시 잡는다’, 코믹 좀비물인 ‘기묘한 가족’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의도치 않게 여유가 생겼고 류 교사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특강을 요청했다고 한다. 엄 대표는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는데 질문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고민한 것들이었다”며 “짧은 특강 시간이었지만 아이들과 대화가 정말 즐거웠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들도 좋았다고 해 기분이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후 류 교사가 올해 한 학기 수업을 다시 부탁했고, 이동 부담이 전혀 없는 원격 수업이라는 말에 재능 기부 차원에서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엄 대표는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건 아니라고 했다. 수업하며 자신도 느끼는 점이 많다고 했다. 그는 “첫 수업 자기소개 시간을 잊지 못한다.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한 아이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무슨 색깔을 좋아한다고 하더라.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얘기하는 아이를 보고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며 “힐링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너무 정글에서 살아왔구나’ ‘저렇게 순수하게 영화를 너무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지’ 같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고 했다.

미래 세대의 영화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점은 보너스라고 했다. 그는 “영화를 좋아하는 포인트가 다양했다. 우리는 보통 배우나 감독, 스토리, 흥행 여부 같은 걸 따지는데, ‘그 영화는 색감이 좋아서 좋다’처럼 신선한 시각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며 “한국 영화를 잘 안 본다는 학생,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배우를 좋아한다는 아이들과의 대화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고 말했다.

엄 대표는 수업을 하며 고교 시절 직업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는 “숭실대에서 영화 강의를 하고 있고 학생들 멘토링도 하고 있는데 영화를 전공한 대학생인데도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이 있다. 대학 가서 진로를 고민하면 늦은 감이 있다”며 “고교 시절 이런 수업(현장 전문가의 수업)을 많이 받아 본 아이들은 아마도 대학에 가서 방황하는 시간이 적을 것이다. 대학을 왜 가는지, 대학이 자기 인생에서 왜 중요한지 고교 시절 충분히 생각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엄 대표는 이어 “아이들과 얘기해보면 웹툰·웹소설 작가, 요리사, 화가, 의상디자이너 등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유명인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이런 바람을 학교가 충족해줬으면 한다”며 “영화 일이 바빠지면 수업은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열정적인 교사 친구를 둬서 우연히 참여했지만 현장 전문가들이 학교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보상 체계와 제도적인 통로가 필요해 보인다. 학생에게도 도움이 되고 현장 전문가들도 좋은 일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