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도장 주렁주렁 들고 계약” 세모녀 투기단 추적기

입력 2021-05-10 00:05 수정 2021-05-10 00:05
수도권 일대를 중심으로 500채가 넘는 주택을 소유하면서 70여명의 빌라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세 모녀 전세투기단’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사진은 지난달 14일 도심 공공주택 복합개발사업 2차 후보지로 선정된 서울 미아역 인근 빌라 밀집지역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말부터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가 속출하면서 피해자 단체대화방까지 만들어지자 세 모녀는 자취를 감췄다. 아직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전세 계약 연장 여부를 문의하는 세입자들만 간간이 그들과 연락이 닿는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지난달부터 피해자들의 제보를 바탕으로 세 모녀 명의 부동산 목록을 입수해 실체를 추적했다.

“도장 주렁주렁 달고 계약서 써”

국민일보가 접촉한 70여명의 피해자 중에는 두 딸을 직접 봤거나, 연락을 취한 사람은 없었다. 모든 계약은 두 딸의 대리인을 자처한 어머니 김모(56)씨를 통해 이뤄졌고 계약과 관련한 모든 연락은 김씨가 전담했다.

전세금을 돌려 받지 못한 이모(31)씨는 2019년 초 계약일에 만난 김씨의 모습을 기억했다. 이씨가 전세로 사는 집의 소유자는 첫째 딸 박현주(가명·32)씨였는데 김씨가 등장했다. 이씨는 “전세계약서를 작성하려는데 김씨가 도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며 “어림잡아도 7개가 넘어 보였다”고 말했다. 이씨가 호기심에 “도장을 왜 이렇게 많이 갖고 다니냐”고 묻자 김씨는 “원래 갭투자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닌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씨는 부동산 업계에서도 악명 높은 임대사업자였다. 2년 전 김씨 모녀의 매물을 중개한 적이 있는 서울 강서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이 동네에서 그 엄마(김씨)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진짜 못된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건축주와의 계약에서) 설정된 근저당을 다 말소시키고, 전세확정일자를 받고, 세입자가 전입신고까지 하도록 안전하게 중개했는데 그 뒤에 집주인이 (세 모녀로) 바뀌어버려서 중개사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면서 “나중에 바뀐 집주인이 사기 치려는 사람인지 우리도 알 수 없지 않냐”고 토로했다.

김씨가 처음부터 세입자들과 연락을 끊은 건 아니다. 계약 초반 김씨는 집주인이자 경기도 부천의 한 빌라 동대표로 활동했다. 자신이 세를 준 건물들에서 동대표를 맡으며 세입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다 전세 만기가 다가와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되자 세입자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국민일보가 입수한 해당 빌라 입주자 단체 메신저 대화록에는 김씨의 이 같은 모습이 담겨 있다. 동대표를 자원한 뒤 주차 문제나 건물 보수 문제 등 잡다한 민원 업무를 도맡아했다. 소음 문제로 이웃 간 갈등이 생기면 중재하기도 했다. 동대표까지 맡은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세입자는 아무도 없었다. 김씨는 지난해 1월 돌연 단체대화방에서도 사라졌다. 빌라의 각종 편의를 위해 논의하던 대화방은 어느새 김씨에게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 대화방이 됐다.

주소지 현관문엔 소송 관련 우편물만

최근까지 세 모녀가 살고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아파트다. 경기도 부천에 살던 김씨가 2014년 12월 4억원에 매입한 복도식 아파트다. 두 딸의 등기부등본상 주소지도 이 아파트다. 세 모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흔적은 곳곳에 묻어 있었다.

지난달 22일 찾은 주소지 현관문 앞에는 ‘우편물 도착안내서’가 눈에 띄게 붙어 있었다. 서울중앙지법이 첫째딸 현주씨 앞으로 보낸 등기였다. 빌라 가압류와 관련된 우편물로 추정된다. 실제 법원은 지난해 11월 현주씨 명의의 부동산 156건에 대한 가압류를 결정했다.

또 다른 우편물은 동생 박민희(가명·29)씨 앞으로 온 ‘내용증명’ 우편물이었다. 전세 계약 해지 의사를 가진 피해자들이 보낸 내용증명으로 추정됐다. 전세보증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이사를 가면서 ‘보증금을 받을 권리’를 등기부등본상에 표시하는 ‘임차권등기’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피해자들이 계약해지를 통보할 내용 증명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날 오전 붙어 있던 두 장의 안내문은 오후 일제히 제거됐다. 한 주민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웃들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집을 찾아왔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기억했다. 한 이웃 주민은 “지난해 말 피해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복도 구석에서 하루 종일 (세 모녀를)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웃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온다”며 “(세 모녀가 사는 집)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상황이 꼬였다”는 김씨의 해명

아직 경찰이 혐의 적용을 하지 않았지만 70명이 넘는 피해자들은 세 모녀를 ‘사기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전세금만 제대로 돌려주면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피해자들 주장처럼 전세금을 마련해서 돌려주면 해결될 일이지만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김씨는 국민일보에 “전세금 해결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의지와 현실은 따로 인 듯하다”고 해명했다. 애초부터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을 의도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꼬이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 것에 대해선 코로나19와 정부 부동산 정책에 책임을 돌렸다. 김씨는 “임차인들이 코로나 때문에 집을 잘 안 보여준다. 또 (정부의 부동산) 정책으로 매매 진행도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입자들이) HUG에 보증보험을 청구해 이사를 가는 경우가 누적되다 보니 다른 집들까지 가압류됐다”고 해명했다. 세 모녀 소유의 빌라 세입자들은 빌라가 가압류 되자 전세 계약 조기 종료를 통보하고 보증금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HUG 관계자는 “(세 모녀 소유 주택의 경우) 전세금 지급명령이나 구상권 소송을 해서 경매를 추진하고, 다른 물건 매각이나 예금·채권을 찾아 압류하는 등 회수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장군 신용일 기자 genera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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