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과 총선, 재보선을 치르고 20대 대선을 앞둔 정치권 곳곳에서 현금성 복지정책을 거리낌 없이 내놓는 경향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코로나19에 따른 전방위 경제적 타격을 조금이라도 보전하자는 차원이지만, 여기에 표심을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 더해지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베팅하듯 선심성 정책 또는 공약을 내놓는 형국이다. 사회의 갈등 이슈를 조율·조정하고 통합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지만, 이런 본질은 사라지고 최근에는 현금으로 갈등을 조정하려는 이른바 ‘현금 정치’가 노골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부터 정치권의 복지 어젠다는 현물에서 현금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추세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 정세균 전 총리가 잇달아 내놓은 현금성 복지공약은 정치권의 포퓰리즘 논란을 재점화시켰다. 이 지사는 ‘고졸자 세계여행비 1000만원’, 이 전 대표는 ‘제대 의무복무군인 3000만원 통장’, 정 전 총리는 ‘사회초년생 1억원 통장’을 내세워 청년층 표심 공략에 나섰다가 야당 비판을 받았다.
이런 논란은 지난해 5월 국내 첫 전 국민 대상 현금성 복지였던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될 무렵부터 시작됐다. 이인영 전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해 총선 선거유세에서 “고민정 후보를 당선시켜주면 100%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가 “돈 받고 싶으면 고 후보를 찍으라는 말이냐”는 공세에 휘말렸다.
전통적으로 ‘현금 복지’를 거부해온 야당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월 서울시장 출마 유세에서 ‘1억원대 결혼·출산 지원’을 앞세웠다.
반복되는 논란에도 정치권의 현금 복지 공세는 오히려 강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0년대 초반에는 무상급식·무상교복 같은 현물복지 등이 격렬한 찬반논쟁에 휩싸였지만 최근에는 아예 현금을 지원하는 상황을 맞았다.
정치권이 현금성 복지 도입을 위해 본격적인 드라이브를 건 것은 청년배당, 청년수당 정책이 추진된 2010년대 중반부터다.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중앙정부 반대에도 각각 청년배당(현재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청년수당 제도를 도입했다.
청년배당 도입 전에도 노인기초연금이나 아동양육수당 같은 현금복지제도가 있었지만, 새로운 현금복지정책을 도입하기는 부담스러운 분위기였다. 현금 지급 시 도덕적 해이 우려가 컸고, 세금을 걷어 현금을 살포한다는 상대 당의 공세가 강력했다.
현금 복지가 금기시되던 정치권의 판도는 지난해 초 코로나19 확산으로 민생경제가 커다란 타격을 입으면서 뒤집히기 시작했다. 상대 당의 포퓰리즘 공세에 맞설 강력한 명분이 생기면서 현금 복지의 빗장이 풀렸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에 나선 것 또한 정당성을 제공했다.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난색을 보일 때마다 정치권에선 “전쟁 중에 수술비를 아낀다”고 몰아세우며 반대를 무력화시켰다.
정부의 재난지원금 지급과 선거철 여야 정치권의 민생 챙기기는 현금 복지 확산의 결정적 도화선이었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정부의 재난지원금 공약이 나오자 야당에선 전 국민 재난지원금 50만원 지급 주장이 나왔고, 이를 기점으로 50조원이 넘는 1~4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되는 동안 현금 복지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소멸하다시피 했다. 지급 대상을 보편적으로 할지 선별적으로 할지가 논쟁거리로 남았을 뿐이다.
기본소득을 기치로 보편적 현금 복지를 추진해온 이재명 지사의 지지율 약진 또한 정치권을 자극했다. 경기도 자체 재난지원금 지급 등 이 지사의 독자 행보를 비판해온 민주당 내 경쟁 후보들이 최근 앞다퉈 현금성 복지정책을 쏟아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9일 “정치적 이유로 경쟁적인 포퓰리즘이 벌어지고 있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현금성 복지의 재원 마련 방식은 물론 효과에 대해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경제 측면에서는 소비 진작 효과가 30%에 그친다는 연구와 78%에 달한다는 연구가 공존한다. 근로의욕 저하 및 인플레이션 우려 주장과 이런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는 반박이 부딪친다. 김 교수는 “재난지원금 같은 지출의 성장 효과는 일반적으로 다른 부양책보단 덜 나오는 경향이 있다”며 “주지 않는 것보단 나을 뿐 양극화와 형평성 문제 등 고려해야 할 여러 변수가 많아 효과를 한마디로 규정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대선 주자 3명의 현금성 복지정책 역시 재원 마련 측면이 약점이다. 정 전 총리는 사회초년생 1억원 통장의 재원을 상속세와 재산세 강화로 마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는 조세저항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 전 대표의 제대 의무복무군인 3000만원 통장 공약 역시 병사 월급의 대폭 인상이 전제돼야 해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다. 이 지사의 ‘고졸자 세계여행비 1000만원 정책’ 역시 재원 마련 계획이 없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현금성 복지 정책 발표 시 반드시 구체적인 재원 계획이 함께 담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원계획이 빠진 현금 복지 공약은 포퓰리즘 구호에 불과하다”며 “공약을 제안할 때 정책대상과 소요예산 및 재원, 선결과제를 반드시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