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문제로 관계가 틀어지면서 통화조차 못 하던 한·일 외교수장이 5일 처음 마주 앉았지만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문제를 놓고 신경전만 벌였다. 양측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미·일 3국이 협력하는 데에서만 의견 일치를 봤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은 이날 영국 런던의 한 호텔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를 마친 뒤 별도의 장소로 옮겨 약 20분간 양자 회담을 했다. 지난 2월 정 장관 취임 이후 첫 회동이다.
외교부와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모테기 외무상은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 문제에 관한 일본 측 입장을 설명하고 우리 정부가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일본은 피해자 배상을 포함한 일련의 역사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으로 해결돼 이에 배치되는 우리 사법부 판단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정 장관은 일본의 올바른 역사인식 없이는 과거사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위안부 및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우리 입장을 설명했다. 앞서 정 장관은 우리 정부가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했으나 일본이 이를 거부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피력한 바 있다.
정 장관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과 관련해서도 일본 결정이 주변국과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이뤄진 데 대해 깊은 우려와 반대 입장을 전달했다. 이어 오염수 방류는 우리 국민의 건강과 안전, 해양 환경에 잠재적 위협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히 접근해야 함을 강조했다. 모테기 외무상은 “(한국 측에) 필요한 정보 제공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우리 정부의 대응에 대해선 우려를 표했다.
정 장관은 한·일 장관회담 후 “좋은 대화를 했다. 어젯밤(만찬)에도 모테기 외무상과 오래 얘기했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은 작년 9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취임 후 한·일 외교당국 간 첫 고위급 대화다.
그나마 북한 문제에선 협력의 필요성을 공유했다. 한·일 장관회담과 앞서 열린 한·미·일 장관 회의에서 이들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의 실질적 진전을 위해 공조를 강화하고, 미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도 3국 간 계속 긴밀히 소통, 협력하기로 했다.
한 외교소식통은 “한·일 공조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안은 북한 문제일 것”이라고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진행됐으며 양국(한·일) 간 의사소통을 본격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지난해 2월 독일 뮌헨안보회의 이후 1년 3개월 만에 이뤄진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는 미국 측 제안에 의해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선 북핵 문제만 다뤄졌고 중국 등 다른 이슈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다만 “유엔 회원국들의 안보리 결의들을 완전히 이행할 필요에 대해 (한·일이) 동의했다”고 말했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