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에 추가해 지니는 의무는 평화적 통일을 위한 노력이다. 헌법 66조 3항은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구상을 밝혀왔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10·4 남북정상선언, 문재인 대통령의 2018년 4·27 판문점선언 등 남북정상회담 결과물도 그래서 나왔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3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항구적 평화체제 정착은 이제 다시 멀어졌다. 판문점에서,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느꼈던 한반도 평화의 봄은 이제 다시 되돌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 사이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일방적으로 폭파시켰고, 남측과 모든 공식 연락채널을 단절했다. 대남 관계를 총괄하는 북한의 김여정은 “3년 전 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했다.
사실 비핵화 문제든, 종전선언이든 한반도 관련 문제는 어느 정부에서나 부침이 있었다. 이는 남북관계뿐 아니라 북·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차 북핵 위기 이후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 완전 복귀, 모든 핵시설에 대한 IAEA의 사찰 허용, 핵 활동 전면 동결 및 기존 핵시설 해체를 약속했다. 미국은 그 반대급부로 경수로 2기와 중유 제공 등을 담보했다. 2차 북핵 위기를 겪으며 본격 가동된 6자회담에서 북한은 모든 핵무기 및 핵 프로그램 포기, NPT 및 IAEA 복귀 등을 약속했다.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제시했다. 하지만 북한은 1년도 안 돼 첫 핵실험을 감행하고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첫해 6차 핵실험까지 이어졌다.
북한은 남측, 미국과 했던 많은 합의와 약속들을 스스로 파기해왔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공동성명, 2007년 2·13합의, 10·3합의, 2012년 2·29합의는 모두 여지없이 파기됐다. 이후 미국 내에선 북한은 대화할 수 없는 존재,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퍼졌고, 북·미 대화는 단절됐다.
전임 트럼프 행정부는 초기 대북정책인 ‘최대 압박과 개입’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핵 일괄타결로 선회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다른 역대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핵·북한 문제는 보수든 진보든 대한민국 정부가 풀어야 할 무거운 숙제다. 하지만 정권의 명운을 건 북한을 대상으로 한 협상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가 최근 발표한 대북정책 기조는 일단 외교적 해법에 바탕을 둔 이른바 실용적 접근법으로 보여진다. 비핵화 조치와 보상을 단계별로 진행하는 모델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일괄타결 방식은 용도폐기된 게 엄연한 현실이고, 우선 차근차근 서로의 요구를 맞춰가는 게 중요하다.
문 대통령은 얼마 전 “하루빨리 북·미가 마주 앉는 게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출발점의 첫 열쇠는 조만간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이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점진적·단계적 북핵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북한에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는 공동의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오는 10일로 취임 4주년을 맞는다. 남은 임기는 1년이다. 이제는 취임 초기보다 현실적인 접근법이 더 필요해 보인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부담은 내려놓고 초석이라도 단단히 놓겠다는 현실적 방법론으로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야 한다. 어떤 형식이든 대화의 물꼬를 먼저 트는 것이 중요하다.
남혁상 정치부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