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강원도 원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앞에 아이 손을 잡은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열 명 남짓한 이들은 혈우병 환아와 엄마들이다. 시위에 참석한 한 환아 엄마는 “어린이날인데 아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시위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엄마는 “아이들이 그냥 맞던 주사 맞게만 해주세요. 다른 거 없어요”라며 울먹였다. 이들은 12세 미만 혈우병 아이들에게 ‘헴리브라’ 치료제를 맞힐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중이다.
이모씨는 아들 영준(가명·2)이가 생후 5개월이던 어느 날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잠든 영준이의 머리맡을 만져보니 베개가 피에 젖어 있었다. 놀란 이씨가 아이 몸을 살펴보다 귀 안에 작은 상처를 발견했다. 아주 작은 상처였지만 지혈이 되지 않았고 3일 동안 피가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선 ‘혈우병’이라고 진단했다. 혈우병은 작은 상처에도 혈액 응고가 되지 않아 지혈이 더딘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주로 어릴 때 발견된다. 배모씨 아들 성호(가명·3)도 생후 7개월에 혈우병 진단을 받았다.
멍이 쉽게 들고 없어지지 않는 혈우병 증상처럼 혈우병 환아 엄마들의 가슴 역시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이씨는 “장난감마저 위험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고 있다”고 털어놨다. 보행기를 타거나 장난감을 갖고 노는 일은 혈우병 환아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보행기를 태우면 몸과 닿는 가슴 부위에 쉽게 멍울이 지고, 기어다니면서부터는 바닥에 부딪혀 얼굴과 무릎에 피멍울이 든다. 이씨는 “걷기 시작하면 하얀 피부가 검게 변할 만큼 멍 위에 또 다른 멍이 든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밟기만 해도 멍이 들기 때문에 장난감조차 ‘위험한 물건’이 된다.
아이들은 이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매주 두세 번 가슴 부위 정맥에 치료제를 주사하는 방식으로 치료를 받아왔다. 아이가 정맥 주사를 맞는 날은 간호사들도 눈물을 쏟기 일쑤일 정도로 아이에겐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정맥 주사는 한번에 시도하기가 어려워 주삿바늘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넣었다 빼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 아이 몸은 멍투성이가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피하주사 형태의 치료제(헴리브라)가 나오면서 고통을 다소 덜 수 있었다. 정맥주사를 맞지 않아도 되고 지속시간도 기존 약보다 길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게 단점이었지만 지난 2월부터 급여를 적용 받았다. 단 조건이 붙었다. 12세 미만 혈우병 아이들의 헴리브라 요양급여 인정, 처방 조건을 ‘면역관용요법(ITI)에 실패한 경우’로 한정했다. 가슴에 정맥관을 삽입한 뒤 ITI를 시행해야 하고, 실패한 경우에만 헴리브라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맥관을 삽입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이유다.
반면 혈우병 환아 가족들은 헴리브라를 바로 맞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입장이다. 이씨는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보다 ‘뛰지 마’ ‘조심해’라는 말을 더 많이 했는데, 아이들이 이 치료제로 조금만 덜 아프고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심평원은 관련 급여기준 개선을 검토 중이다.
유철우 을지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헴리브라는 피하로 맞을 수 있으면서도 예방 효과가 좋다고 세계혈우연맹(WFH)에서도 인정을 했다”며 “12세 미만에게도 헴리브라를 바로 투약하도록 급여 조건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신용일 기자 mrmonst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