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패기 대신 눈물… 리얼입대 프로젝트… 군예능, 선을 넘다

입력 2021-05-08 04:03
넷플릭스의 코미디 영화 ‘차인표’의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책으로 비유하면 영화 포스터는 표지에 해당한다. 한 면에 제작진의 재능과 고심이 농축돼 있다. 저 제목, 저 사진, 저 글에 합의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성의와 논의를 거쳤을까. 결과가 최고는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과정엔 최선을 다했을 거야. 그러니 악수는 못 청해도 박수는 쳐주자.

이 영화 포스터가 특이하다. 배우 이름 세 글자가 큰 글씨로 적혀 있다. 카피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다. 알고 보니 주연배우 이름이 곧 영화 제목이다. 더 놀라운 건 당사자가 직접 주인공 역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헷갈린다. 혹시 다큐멘터리 영화인가. 아니다. 코미디 장르의 극영화다. 포스터엔 가죽점퍼에 색소폰을 쥔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그래, 내가 기억하는 그 배우 맞다. 미니시리즈 ‘사랑을 그대 품 안에’로 1994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그 사람.

배우 차인표, 아니 영화 ‘차인표’로 군대 예능 얘길 시작하는 배경엔 사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여의도 MBC 시절 제작국이 위치한 3층 복도에 작은 매점이 하나 있었다. 직원과 연예인이 간식을 산 후 여기저기 앉아서 먹는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못 본 얼굴인데 자주 눈에 띄면 신입사원 아니면 공채탤런트, 개그맨이다. 전속 기간엔 매일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박명수도 지나가고 심은하도 지나가고 차인표도 지나간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냥 3층 매점에서 캐스팅되는 일도 간혹 있었다.

그 무렵 나는 ‘TV청년내각’이라는 새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었다. 대학생들이 가상의 나라를 만드는 실험 예능인데 신선한 얼굴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신인 중에 외국 유학생 출신이 있다기에 추천받은 게 바로 차인표였다. 첫인상은 반듯하고 진지했다. 전신(외형)은 모델 같은데 소신(내면)은 롤모델에 가깝다고 할까. 결국 캐스팅은 불발됐으나 친분은 유지됐다. 가끔 3층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정도는 된 것이다.

그 차인표가 드라마 한 편으로 확 뜨더니 이름 석 자 뒤에 신드롬이라는 외래어까지 따라붙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당시 내가 표현한 바에 따르면 ‘정중부의 난’ ‘이자겸의 난’처럼 방송계에 ‘차인표의 난’이 일어났다고 부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이 벼락스타 앞에 어느 날 영장이 날아든 것이다. 구속영장이 아니라 입대영장. 위기 앞에 드러나는 게 교양의 척도다. 그때 그의 심경과 태도는 1994년 12월 MBC뉴스 아카이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군에 가 있는 동안 인기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해서 어떻게든 병역을 피해 보려는 이들과 달리 인기 절정의 두 연예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며 잇따라 군에 입대해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연예인은 차인표와 이휘재다. 뉴스가 이어진다. “인기 절정을 달리던 탤런트 차인표씨는 지난 1일 군에 입대하면서 화려했던 6개월 연기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게다가 미국 국적을 포기하면서까지 군에 들어간 그는 고의적인 불구 수술과 병역을 맞바꾼 연예인들과 달랐습니다” 기자는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차인표 신드롬 등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던 그는 28살 뒤늦은 입대에 적응이 될까 우려 섞인 시각도 당당히 받아넘겼습니다” 차인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물론 처음에 이등병일 때는 더 어렵겠지만 제가 나이 31살 먹어서 병장이 된다면 천하무적 아니겠습니까.”

입대 직전에 그를 만나서 이런 얘기를 해줬다. “과거 ‘우정의 무대’ 연출가로서 조언할게요. 당신은 인기도 있고 인격도 좋지만, 아직 연기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죠. 군대에 가면 온갖 유형의 사람들을 만날 텐데 거기서 적응력을 키워보세요. 적응과 순응은 다릅니다. 무턱대고 순종할 게 아니라 상황에 맞는 연기를 시도해보라는 거죠. 세상에 악인은 별로 없답니다. 악역이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혹시 나이 어린 고참들이 괴롭힌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전원일기’에선 나이 많은 선배(박은수)가 후배(김수미) 아들 역할도 하잖아요” 어떻게 그런 걸 시시콜콜 기억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한 가지다. 그때그때 글로 써서 어딘가에 기고했기 때문이다. 기억은 짧고 기록은 길다.

“괴롭히는 사람 없냐.” 휴가 나온 제자에게 하는 질문이다. 대체로 없다고 답한다. 실제로는 있어도 걱정을 덜어주려고 그렇게 답했을 거다. 그런데 실은 내 질문을 반만 이해한 거다. 나는 “네가 괴롭히는 사람 없냐”고도 물은 건데 상대방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 없느냐라고만 받아들인 것이다. 이게 군대다. 나는 괴롭힌 적 없는데 그는 괴롭다고 말한다. 그는 전혀 괴롭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상당히 괴로웠던 곳이 군대다. 군대에서 많이 쓰는 동사 중에 ‘갈구다’가 있다. 선임이 후임을 갈구는 게 마치 질서유지 차원인 양 눈감아주던 때가 있었다. 어학 사전에는 ‘갈구다’의 의미가 사람을 교묘하게 괴롭히거나 못살게 구는 거로 나온다. ‘교묘하게’라는 건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든 탄력적인 형용사다.

군대에선 ‘필승’이 목표다. 왜 이겨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면 공격에 시달린다. 어찌 보면 공감이 가장 안 일어나는 곳 중 하나가 군대일 수 있다. 불합리해도 ‘충성’해야 하고 싫은 사람에게도 ‘단결’을 외쳐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예능의 소재로 적합할 수 있다. 예능의 한 축이 풍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대한민국군대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프로가 코미디 ‘유머 일번지’ 속의 ‘동작 그만’이라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군대 예능은 선을 넘느냐 안 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일단 고정관념의 선을 넘어야 창의의 언덕이 나온다. 예전의 군대 위문 프로에서 군대는 항상 관중석에 있었다. 그런데 군부대에 직접 들어가 병사들을 무대에 세우고 그들의 오락시간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그를 위해선 설명이나 설교보다 설득이 필요했다. 처음 산통을 겪기 전의 제목 후보는 ‘전우무대’였다. 프로그램의 존폐가 오로지 국방부의 협조 여부에 달려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제작진은 제목을 두루뭉술한 쪽으로 회군했다. 군대가 어려우면 직장이나 학교로 무대를 옮길 수 있는 제목. 그래서 나온 제목이 ‘우정의 무대’였다.

MBC의 대표적 군대 예능이었던 ‘우정의 무대’의 한 장면. ‘우정의 무대’는 ‘우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란 유행어를 낳았다. MBC 제공

‘우정의 무대’는 소속에 따라 목표가 달랐다. 국방부는 군홍보, 방송사는 시청률, 출연군인은 휴가증. 그러나 그 소용돌이 속에 감동이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아닌데도 우리 어머니가 확실하다고 말하던 병사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만큼 어머니가 그리웠던 거다. 국방부는 왜 병사의 패기 대신 눈물을 보여주는 데 동의했을까. 군기만 살아있는 군대는 진짜로 살아있는 군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MBC의 대표적 군대 예능이었던 ‘진짜 사나이’의 포스터. ‘진짜사나이’는 리얼 입대 프로젝트를 표방했다. MBC 제공

‘진짜 사나이’는 ‘리얼입대프로젝트’라는 모자를 쓰고 등장했다. 어찌 보면 ‘체험 삶의 현장’의 병영 버전이었다. 일일체험프로에서 진짜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한 연예인도 있었지만, 카메라 앞에서 노동자의 연기를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진짜 사나이’는 군인과 연예인이 뒤엉킨 프로그램이다. 연예인이야 연기를 하면 그만이지만 예능에 동원된 실제 병사는 좀 혼란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과연 누가 진짜 사나이인가.

채널A가 방송 중인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강철부대’의 포스터. 채널A 제공

현재 방송 중인 ‘강철부대’는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들이 명예를 걸고 대결을 펼친다. 군사행동은 리얼에 가깝지만 사적인 대화는 편집자가 거른다.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지점이다. 출연은 리얼이지만 연출엔 계획과 계산이 있다. 예능국 회의실에서 언성이 높아질 때 가끔 들리는 말이 있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네” ‘웃자’는 의도일 뿐 결과는 ‘죽자’일 수 있다. 그러니 제작자는 세심하고 출연자는 조심해야 한다. 지뢰는 곳곳에서 희생자를 노리고 있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