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이돈응 서울대 교수의 제안으로 서울 구로아트밸리에 기존의 오르간과는 전혀 다른,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풍관’이란 이름의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했다. 풍관은 이 교수와 9개월간의 토론과 연구 끝에 완성했다. 파이프오르간에서 케이스, 연주대 등의 형태를 해체하고 파이프만 남겼다. 그리고 공연 15분 전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자동으로 모터가 작동해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이 각 파이프로 전달돼 음악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파이프오르간에 대한 관념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던 중 비무장지대(DMZ)에 평화의 오르겔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분단국가인 한국에 살생을 위해 사용하는 전쟁 무기를 재료로 파이프오르간을 만든다면 평화를 상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 같았다.
계속 무기오르겔에 대한 마음이 지워지질 않던 중 2019년 내 마음을 알고 계시던 송길원 양평 청란교회 목사님이 계속 묵혀둘 순 없다며 말을 건네셨다. 때마침 다가오는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인 2023년에 무기오르겔을 만들어보자는 논의를 시작하게 됐다. 잔혹한 전쟁이 게임이나 영화 등에서 흥미 위주로 소비되는 이 시대에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난해 7월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 게시물을 올렸다. 2023년에 DMZ에서 연주할 ‘무기오르겔’을 만들 수 있도록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청원 숫자인 20만명을 채우진 못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 것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었다. 그 후 이 구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분들과 지난 4월 ‘무기오르겔’ 프로젝트를 위한 시민단체 ‘건반 위의 평화’를 설립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와 안위를 허락하셨고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길 원하셨다. 평화와 자유를 갈망했던 독립운동에 기독교인이 주축이 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잔혹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엔 결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전쟁에 사용됐던 무기들을 해체해서 평화의 소리를 내는 악기로 다시 만든다면 어떨까.
DMZ가 아니더라도 무기오르겔이 있는 곳이 랜드마크가 되고 전 세계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찾아와 뜻을 같이하고 협연한다면, 그래서 대한민국이 평화의 주축이 될 수 있다면 종국엔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무기를 재료로 재탄생된 파이프오르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이 있을 것이다. ‘건반 위의 평화’는 그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