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성훈 (12) 마치 빨간 파이프오르간에 그려진 나비가 살아난 듯

입력 2021-05-04 03:03
김동진(요한선교단) 쿠네츠(슬로브쥐차교회) 목사,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 임현영(왼쪽부터) 선교사가 우크라이나 키예프 슬로브쥐차교회에 설치된 나비오르겔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슬라브쥐차(생명의빛)교회로 보낼 파이프오르간을 완성한 2017년 8월, 제작소에서 기념 예배를 드리던 날이었다. 장마철이긴 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그치지 않고 세찬 비가 쏟아졌다. 이런 날씨에 이 외진 제작소까지 과연 몇 명이나 오려나 싶었다.

그런데 장대비를 뚫고 40여명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제작소를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그간 제작의 어려움과 소회를 나눈 후 제막식 순서가 됐다. 천을 걷으려는 순간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순간 ‘저 나비를 어디서 봤지’란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사회자로서 진행해야 하는 나는 이내 천을 걷었다.

제작소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제야 내가 그 하얀 나비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났다. 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빨간색 파이프오르간 정면에 제작소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똑같이 생긴 하얀 나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열여덟 번째 작품의 제목은 ‘나비오르겔’이었다. 한국화 화가 안명희 작가와 함께 작업한 이 작품은 뒤주를 본뜬 육면체를 빨간색으로 칠한 후 그 위에 나비를 가득 그려 넣은 모습이었다. 그날 참석자 중 절반 정도는 비기독교인이었는데 모두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성령께서 그 예배 가운데 함께하심을 체험했다.

나비오르겔 정면 모습.

마침 그 해는 우크라이나의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자 한국과 우크라이나가 수교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여러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지만, 크림반도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인지라 한국 정부에서는 별도의 사절단을 보내지 않았다. 기념 예배를 마친 오르간을 정성껏 포장해서 현지로 보낸 후, 모금하는 일에 앞장섰던 추진위원회 일곱 명과 나는 각자가 가진 달란트를 활용해 문화 행사를 준비해 9월 키예프를 찾았다. 졸지에 한국의 문화사절단이 된 것이다.

그곳으로 운송된 파이프오르간을 교회에 다시 설치하는 열흘 동안 우리는 사진전과 회화전, 파이프오르간 연주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었다. 나비오르겔 봉헌식을 하던 날, 우크라이나 문화부 장관이 교회를 찾았다. 당시 이양구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도 한국의 위상을 높여줬다며 고맙다는 뜻을 밝혔다. 현지인들도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선물 받은 것에 기뻐하며 우리를 환대해줬다.

그렇게 우크라이나의 무너진 교회 터 위에 새롭게 교회가 세워졌고, 우리는 그곳에 파이프오르간을 선물했다. 그 소리를 통해 우크라이나인들은 위안과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이는 분명 또 다른 형태의 선교였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우리 모두 각자의 소명을 갖고 전도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