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딸’ 이번엔 아이다 도전… “악보보며 자신감 생겼죠”

입력 2021-04-30 04:05 수정 2021-05-02 12:20
소프라노 강혜명이 최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인터뷰하며 포즈를 취했다. 그는 5월 7일부터 9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제12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 ‘아이다’의 타이틀롤로 무대에 선다. 최현규 기자

소프라노 강혜명(43)에게는 ‘제주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2017년 제주 4·3 유가족 홍보대사를 맡은 데 이어 지난해 4·3사건을 소재로 한 창작오페라 ‘순이삼촌’의 대본을 쓰고 연출하면서다. 하지만 제주에 대한 애정만큼 꾸준히 유럽 주요 오페라극장 무대에 서며 오페라의 본령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그가 5월 7일~6월 6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제12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 ‘아이다’의 타이틀롤로 관객과 만난다. 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베르디의 ‘아이다’는 글로리아 오페라단 창단 30주년 작이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그를 만났다.

“‘아이다’는 이번에 처음 도전하는 작품입니다. 무거운 목소리의 아이다 역이 제게 맞을지 고민했지만, 악보를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소프라노라도 목소리의 음색과 크기 등에 따라 유형이 갈린다. 작품 속 배역도 달라진다. 젊은 시절 서정적인 소리를 내던 리릭 소프라노가 나이를 먹으며 무거운 질감의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스펙트럼을 확대하기도 한다. 강혜명 역시 20대에는 ‘카르멘’의 미카엘라로 주로활동했지만 점점 푸치니 ‘나비부인’의 초초, 베르디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와 ‘가면무도회’의 아멜리아 등으로 배역을 확대해 왔다.

“최근 푸치니와 베르디의 작품에 많이 출연했죠. 굳이 비교하자면 음악적인 면에서 푸치니는 오케스트레이션의 선율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면 베르디는 성악가의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르디 작품 속 역할을 새로 맡을 때마다 배역에 대해 고민을 하며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추계예술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과 파리 에콜 노르말 음악원을 졸업한 강혜명은 2004년 한국의 국립오페라단, 프랑스 오랑주 페스티벌, 일본 후지와라 오페라단과 합작한 ‘카르멘’ 오디션에서 유일한 한국인 소프라노로 결선에 진출하며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후지와라 오페라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하며 정명훈 지휘로 NHK 신년음악회에 출연했고 이후 이탈리아 산카를로 극장 최초의 동양인 비올레타로 ‘라트라비아타’ 무대에 섰다. 프랑스 마르세이유, 툴루즈,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스위스 루체른 등 다양한 극장에 캐스팅됐다.

소프라노로서 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오던 그가 지난 몇 년간 오페라 대본 작가이자 연출가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모습은 다소 낯설다. 계기는 제주 출신인 그가 2015년 자신의 가족사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제 외증조부님과 형제분들께서 4·3으로 돌아가셨어요. 할머니는 당신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셨어요. 할머니의 남편, 제 할아버지도 6·25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셨어요. 당시 제주에선 빨갱이로 몰리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국군에 입대했었대요. 할머니는 시대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으신 거죠. 2015년 이런 내용을 알기 전까지 제게 4·3은 교과서에서나 배운 한 줄의 역사가 다였죠.”

가족사를 알게 된 후 4·3 사건 등 한국근대사 공부에 몰두했다. 4·3 유가족 홍보대사로도 활동하며 4·3 사건을 오페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오랫동안 금기시됐던 4·3 사건을 대중적으로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떠올리고 오페라의 대본으로 삼기 위해 수십 차례 읽었다.

"현기영 작가님을 처음 만났을 땐 허락을 못 받았어요. 성악가로서 제 모습만 보셨던지라 오페라를 제작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 선뜻 허락하기 쉽지 않으셨을 거에요. 세 번 찾아간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여순사건을 소재로 한 창작오페라 ‘1948 침묵’의 2018년 공연이 현 작가의 마음을 움직였다. 강혜명은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출연도 했다.

“제주4·3과 여순은 근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나눈 형제라고 생각해요. ‘1948 침묵’의 예술감독님은 제가 4·3 유족 홍보대사인 걸 모르고 캐스팅 제안을 하셨지만, 운명적으로 제게 온 것 같아요. 원작 대본을 받고는 조금 더 오페라 스타일로 수정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1주일만 시간을 주면 제가 고치겠다고 했죠.”

소프라노 조수미를 동경하기 전에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는 1주일간 밤을 새워가며 대본을 수정했다. 무대에 오른 ‘1948 침묵’이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이 현 작가에게도 전해지면서 ‘순이 삼촌’의 오페라화가 이뤄졌다. 오페라 ‘순이삼촌’은 지난해 11월 제주에서 초연돼 호평받았으며 오는 9월 제주에서 재공연되고 하반기 서울·경기권 공연을 앞두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가 ‘너무 튄다’ ‘정치적이다’고 말합니다. 고향을 강조하면 자칫 예술가의 활동 반경을 좁힐 수도 있고요. 하지만 고향은 누구에게나 중요하지 않나요. 음악가가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고 봐요. 언젠가 꼭 ‘순이 삼촌’을 들고 해외에서 공연할 거예요.”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