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위협 무섭지만 참혹한 北주민들 위해 뛰어들었다”

입력 2021-04-30 04:04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이 미국 해병대 부사관으로 이라크에 파병됐던 2006년 진급했을 때 모습. 크리스토퍼 안 변호인단 제공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인 옷가게 사장의 장남, 미국 해병대 부사관, 경영학 석사(MBA) 학위, 한때 직원이 18명이나 됐던 경영 컨설팅 기업의 사장.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41)이 걸어왔던 길이다. 안정적이던 인생 항로가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바로 자유조선이다.

그는 2019년 2월 22일 자유조선이 주도한 스페인 북한대사관 진입 사건에 가담했다. 스페인 사법당국은 그의 송환을 요구했다. 크리스토퍼 안은 지금 미국 법정에서 스페인 송환 여부를 결정할 재판을 받고 있다. 특히 크리스토퍼 안은 “FBI가 2019년 4월쯤 나한테 ‘북한에 의한 암살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말했다. 미국 법원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크리스토퍼 안에게 ‘미국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는데 왜 자유조선 작전에 참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다. 선택은 두 가지다. 구하러 뛰어드느냐, 그냥 지켜보느냐. 나에겐 참혹한 인권상황에 빠져 있는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크리스토퍼 안이 지난 20일(현지시간) LA에서 가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옮긴다.

LA폭동…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는 고등학생 때 미국에 이민 왔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미국에 왔다. 어머니가 먼저 옷가게 직원으로 일했고, 내가 세 살 때 아버지가 LA에서 옷가게를 개업했다. 처음에는 잘 됐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11살 때 LA폭동이 일어났다. LA폭동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LA 한인타운 약탈·방화 사건’이다. 많은 한인 가게들이 불에 탔다. 우리 옷가게는 불타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한인 상가에 손님이 끊겼다. 아버지는 집도 팔아야 했고, 조그만 월세로 옮겼다.

LA폭동은 미국 정부가 한인사회를 희생시킨 것이었다. 그때부터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보호해야 한다’는 강한 인식을 갖게 됐다. LA폭동 이후 우리 가족의 생계는 힘들어졌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데 내가 외할머니(현재 99세), 어머니(현재 71세), 남동생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 지냈다. 어머니가 학교는 꼭 다니라고 해서 그때부터 수업을 마치고 옷가게 일을 도왔다.”

이라크전쟁 참전… 그리고 외할머니

“대학에 입학했을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가족을 보호하고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해병대원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자원했다.

나는 해병대 근무 경험을 자랑스러워하지만 내 정체성이 해병은 아니다. 나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해병대 소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규군 해병대가 아니라 생업에 종사하면서 정기적으로 훈련에 참여하다가 유사시 전장에 투입되는 해병 예비병력(Reserve)이었다.

크리스토퍼 안이 이라크 파병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 크리스토퍼 안 변호인단 제공

같이 훈련을 받았던 동료들이 이라크 팔루자로 파병돼 나도 이라크 파병을 신청했다. 그래서 2005년 여름부터 2006년 여름까지 1년 동안 팔루자에서 복무했다.

우리 가족에겐 아주 특별한 얘기가 하나 있다. 같이 사는 외할머니가 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던 도중에 나의 이모를 잃어버렸는데 미군이 찾아줬다고 한다. 외할머니에게 그 미군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팔루자에서 내 친구들이 죽기도 했다. 나는 친구들이 죽은 길을 걸을 때마다 ‘너희들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고 다짐했다.

또 ‘6·25전쟁 때 미군의 도움으로 한국이 훌륭한 나라가 됐듯이 지금 너희들의 희생으로 이라크가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이라크에서 돌아와 해병대에서 제대했다. 내가 어느 정도 어른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유조선…그리고 어머니

“이라크에서 돌아오니, 내가 직접 경험한 이라크 전쟁과 뉴스에서 나오는 이라크 전쟁이 다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참전용사들을 위한 사회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리먼 사태로 경제불황이 오면서 그 단체에 후원이 끊겼다. 고민하다가 버지니아대학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졸업하고 LA로 돌아와 2013년에 경영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한때는 직원이 18명이나 됐다. 그러다가 다른 사업을 모색하고 싶기도 했고, 봉사활동도 하고 싶어서 2017년 회사를 팔았다. 어머니는 내가 자유조선 활동을 했던 것을 몰랐다. 뉴스를 보고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지금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다. 아내는 내가 자유조선 활동을 위해 집을 비울 때가 있어 ‘무슨 일을 하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대충 알려줬다.

북한의 암살 위협을 내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내 두려움이 표시가 나면 아내도 어머니도 외할머니도 장인·장모도 한국에 있는 친척들까지도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내게 ‘나는 북한 암살자들이 여기에 와 있다는 걸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현재까지 내 주변에서 특별하게 느껴질 만한 이상한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국민일보는 <‘자유조선’ 크리스토퍼 안 인터뷰> 시리즈의 3회로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 탈북 사건을 다루려 했으나 사실관계가 불명확한 부분이 존재하는 상황과 관련된 이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도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로스앤젤레스·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크리스토퍼 안 첫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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