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일흔 넘은 김금선(72)씨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며 막대 걸레로 바닥을 닦다 넘어지는 것, 좁은 대기 공간에서 밥을 지어 허기만 대충 달래는 것도 ‘이 나이에 일하는 게 어디냐’며 감내해야 할 일로 여겨졌다. 전북 무주의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인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장과 식당을 전전하며 하루 하루를 넘기는 것 뿐이었다. 술주정하는 남편을 대신해 가장이 된 뒤로는 그마저도 힘들어져 할 수 있는 일은 청소밖에 없었다.
김씨는 1999년 무렵부터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학교 청소를 하며 ‘청소 노동자’가 됐다. 처음 김씨가 손에 쥔 월급은 46만원. 당시 용역업체에 간접 고용된 방식이어서 수수료로 절반 가까운 금액을 떼였다. 같은 기간 중소기업 평균 월급(약 116만원·중소기업연구원 데이터 기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22년간 병원과 학교를 쓸고 닦았지만 스스로 ‘청소 노동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그저 주는 월급을 받아 생계를 꾸리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는 28일 서울 서대문구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아들이 나와 같은 가난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그저 쉴 틈 없이 일해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던 그가 스스로를 노동자로 자각하게 된 건 2008년 즈음이었다. 연세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부터다. 당시 김씨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은 지나치게 높은 용역업체 수수료율을 인하해 줄 것과 휴식 공간 마련 등을 요구했다.
노조가 결성되고 목소리를 내자 학생들도 노조와 연대하며 함께 목소리를 높여줬다.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았던 ‘청소 노동자’의 존재를 알렸고 최저임금에 못 미쳤던 임금도 점차 현실화됐다. 지난해 말 정년퇴직할 당시 김씨가 받던 월급은 약 200만원 수준이었다. 그는 “사비로 청소도구를 사고 좁은 대기실에서 밥을 해 먹으며 일을 하다 청소 노동자들이 대학생들과 연대해 학교를 상대로 투쟁하는 경험을 하면서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일터를 떠났음에도 김씨의 노동은 끝날 줄 몰랐다. 일흔둘의 나이에도 여전히 그를 불러 줄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김씨는 “아픈 허리가 좀 나으면 일을 더 해 볼 생각”이라며 “나중에 아프지 않게, 잠을 자듯이 가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일자리를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계를 위해 노동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인들과 ‘노년아르바이트노조(노년알바노조)’를 결성키로 했다. 나이 많은 노동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동료들을 주위에서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노년알바노조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은 임진순(75)씨도 김씨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렸다. 임씨는 “청소 노동을 시작한 1999년 월급이 32만원에 불과했는데 용역업체 갑질이 심해도 먹고 살기 위해선 참을 수밖에 없었다”며 “청소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 조건 개선, 시급 인상을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고 ‘뭉치는 힘’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2016년 정년퇴직을 한 임씨는 현재 서울 마포구 이대역 인근의 한 오피스텔 건물에서 여전히 하루 3시간씩 청소 노동을 하고 있다. 아픈 남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노년알바노조의 최종 목표는 일하는 노년의 삶을 대표하는 노조로 자리 잡는 것이다. 현재는 청소노동자 위주의 노조이지만, 향후 여러 직군으로 저변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허영구 공동준비위원장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빈곤율이 1위”라며 “일하는 모든 노인이 정당하게 고용계약을 맺고 최저임금을 보장받는 등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씨는 “가난 때문에 평생을 일했지만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면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노년알바노조는 공식 출범에 앞서 오는 29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 기념관에서 평등노동자회와 함께 준비위원회를 개최한다. 노조설립에 참여한 9명의 청소노동자의 삶의 궤적을 세세하게 담은 구술기록집도 함께 발표할 예정이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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