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윤여정처럼 늙는다는 것

입력 2021-04-28 04:05

배우 윤여정은 26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후 기자간담회에서 ‘미나리’란 작품을 하게 된 이유를 묻자 정이삭 감독이 진심으로 쓴 진짜 이야기가 “늙은 나를 건드렸다”고 했다. 이어 자신이 “늙은 여우니까” 좀 더 생각해보다 정이삭이라는 ‘사람’을 보고 결정했다며, 거듭 자신이 늙었음을 이야기했다. 윤여정은 “우리 동양 사람들이 너무 안 됐잖아요. ‘아카데미 월(wall·벽)’이 ‘트럼프 월’보다 너무 높아가지고”라며 “최고가 되려 하지 말고, 최‘중(中)’만 하며 살아도 되지 않나”고도 했다. 수상 소감을 밝힐 때도 자신은 유럽인이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동양의 한국인 배우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그런 윤여정의 오스카상 수상을 기록한 후배의 기사 제목은 “윤여정, 도도한 아카데미 벽 허문 ‘늙은 아시안 여배우’”였다. 윤여정을 몇 차례 만나 인터뷰했던 후배는 윤여정을 “평소 매우 ‘쿨’한 어조로 자신을 ‘늙은 여배우’라고 칭하는 백전노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배우가 강조한 정체성을 작은 따옴표로 인용한 제목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에 달린 댓글은 달랐다. 굳이 “‘늙은’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냐”고, “제목이 저게 뭐냐”고 탓하는 이들이 많았다.

윤여정이 생각하는 늙음과 대중이 인식하는 늙음의 거리는 꽤 멀어 보였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윤며들고(윤여정에 스며들고)’ 있던 어젯밤, 나는 사람들이 꺼리는 늙음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윤여정이 궁금해졌다. 윤여정은 영화 ‘계춘할망’을 찍은 2016년, 여러 인터뷰에서 늙어감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해였다. 그는 “늙어간다는 건 삶의 질서 아닌가. 늙는다는 것은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다”고 했다. 늙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윤여정에게 나이는 훈장도, 완장도, 그렇다고 장애물도 아닌 듯했다. 아무리 무수한 데이터를 들이대도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며 나이를 앞세우는 꼰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늙었다고 다 아는 건 아니에요”라는 말을 라이브로 중계되는 기자간담회에서 툭 꺼내놓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런가 하면 윤여정은 “내 나이에 잃을 게 뭐가 있겠어. Nothing to lose”를 외치며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 감독을 평가한 윤여정의 말은 나이를 떠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믿고 따르는 진짜 어른의 내공을 보여주는 듯했다.“정 감독은 너무 어린 앤데, 수십 명을 컨트롤해야 하는 현장에서 차분하게 진행하더라. 한국 사람의 종자로 미국 교육을 받아서 굉장히 세련된 한국인이 나왔구나. 지켜보면서 희망적이었고, 43살 먹은 앤데 내가 존경한다고 했다.”

윤여정을 예능의 세계로 이끈 나영석 PD는 ‘윤스토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으신데, 나이든 여성의 느낌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어떤 한 명의 예술인, 연예인, 배우라는 느낌이 컸다. 나이에 의해서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입고 싶어하는 것, 하고 싶어하는 것, 도전하고 싶은 것에 의해 정의되는 사람이다.”

요즘 한국에선 ‘MZ세대’의 등장 이후, 갈수록 세대 간 소통의 어려움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잘 늙어가는 길, 꼰대 아닌 멘토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사람이 많다. 윤여정의 연기도, 작품도, 매일 좋아하는 사람과 일하는 건 사치라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온 삶의 여정도 좋았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윤여정처럼 늙어가는 것’을 통해 나이듦의 새로운 길을 보여준 것이야말로 대체불가한 윤여정이 해낸 일이다. 나처럼 그 길을 꿈꾸며 윤며드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김나래 온라인뉴스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