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98년 1월 1일에 가족들과 함께 창경궁을 찾았다. 고궁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는데 문득 ‘40세가 되면 뭘 하고 있을까’ 고민했던 27세의 내가 떠올랐다. 그날이 바로 내가 40세가 되던 해였다. 나도 모르게 “40세에 내가 마이스터가 됐네”라고 했더니 가만히 듣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그러네요”라며 호응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 제작자 1세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번째 파이프오르간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소성당에 지었다. 이 파이프오르간은 마이스터 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실기시험 때 만들었던 작품이다. 94년 독일 유학 중 한국에 왔을 때 서울주교좌성당 수석오르가니스트인 조인형 성공회대 교수와 소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중세교회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작은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조 교수와 서울주교좌성당 음악감독인 이건용 한예종 교수도 이곳에 나의 첫 번째 작품을 짓길 원했다.
98년 5월 소성당에 파이프오르간을 완성하고 봉헌예배와 봉헌 기념 연주회를 열었다. IMF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독일에 있을 때 이미 수주를 받았기 때문에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공명이 잘 되는 공간에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감동이 밀려왔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인 파이프오르간을 만드는 것이 소명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IMF의 여파를 피해가진 못했다. 경제가 초토화되고 문을 닫는 회사가 속출하는데 값비싼 파이프오르간을 짓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다시 독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후로 몇 년간 단 10원도 벌지 못했다. 그저 둘째 딸을 데리고 오전에 놀이터에 가서 오후 서너 시까지 그네를 밀어주는 일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아내는 “그럴 시간에 기도를 더 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에 보내신 것 같았다. 아내와도 사소한 일로 많이 싸웠다. 돌이켜 보면 나의 자격지심이었던 것 같다. 아내에게 참 미안하다.
그러던 중 2000년 봉천제일교회(현 큰은혜교회)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나로서는 큰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이었다. 나는 한국에 제작소는커녕 도울 수 있는 직원이나 공구도 없었음에도 덜컥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임시로 작업실을 빌리고 현지 제작자를 고용해서 원정 제작을 시작했다. 1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을 다시 해체해 2001년 한국으로 가져와서 교회에 설치했다. 기적 같은 결과였다.
그 뒤로 하나둘씩 주문이 들어와 현재까지 20대의 파이프오르간을 지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고 매번 절실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하시는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동안 제작한 파이프오르간이 모두 소중하고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도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몇 대가 있다. 그중 하나는 경기도 용인 아름다운동산교회에 지은 세 번째 파이프오르간이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