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41세의 한국계 미국인 남성이 있다.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났고, 미국 해병대 부사관으로 이라크에서 1년 동안 복무했다. 버지니아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딴 뒤 컨설팅 업체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부인은 역시 한국계로 고등학교 교사다.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살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안.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2019년 2월 22일 발생했다. 빈손으로 끝난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닷새 전이었다.
‘자유조선’ 회원 10명은 그날,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북한대사관에 진입했다. 크리스토퍼 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자유조선은 북한 정권에 대항하면서 북한 주민들을 위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진 채 활동해온 단체다.
자유조선은 “북한 외교관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우려해 납치극을 가장한 탈출을 부탁했다”고 강조하는 상황이다. 납치 위장극이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스페인 사법당국은 자유조선이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감금하고, 컴퓨터 등을 들고 나왔다는 이유로 이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안은 이 사건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미국이 스페인과 맺은 범죄인 인도청구조약에 따라 그의 스페인 송환 여부를 결정할 법정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스페인 북한대사관 진입이라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터지면서 자유조선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크리스토퍼 안은 알려지지 않은 자유조선의 여러 활동에 관여해 왔다. 그중 하나가 북한 김한솔 구출 작전에 나섰던 이야기다. 김한솔의 아버지는 북한 지도자였던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다. 그러니까 김한솔은 김정일의 맏손자이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조카다. 김정남은 이복동생 김정은에게 북한 권력을 빼앗긴 ‘비운의 황태자’였다.
김정남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북한의 사주로 이뤄진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고 숨졌다. 당시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던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이 목숨을 잃자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 그리고 자유조선의 리더이며 한국계인 에이드리언 홍 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정남 사망 이틀 뒤인 같은 달 15일부터 16일까지 36시간 동안 타이베이 공항에서 김한솔과 그의 가족의 구출을 도왔던 사람이 크리스토퍼 안이었다.
크리스토퍼 안은 “김한솔은 ‘북한이 너(김한솔)를 죽이려고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내게 털어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타이베이 공항에 나타난)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김한솔에게 ‘어디로 가고 싶은가’ ‘우리는 당신 가족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딱 두 마디를 전했다”고 기억했다.
국민일보는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LA에서 크리스토퍼 안과 7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인터뷰는 1년반이 넘는 시간에 걸쳐 추진됐다. 크리스토퍼 안이 한국 언론과 만난 것은 처음이다. 대면 인터뷰에 나선 것도 해외 언론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국민일보는 크리스토퍼 안과의 인터뷰 내용을 5회에 걸쳐 보도할 계획이다. 크리스토퍼 안은 인터뷰에서 김한솔 구출 작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어떻게 김한솔 구출 작전에 뛰어들게 됐나.
“나는 그때 필리핀 마닐라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김정남 암살 다음 날인) 2월 14일 오후 9시쯤 에이드리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마닐라에 있다’고 답하니까, 에이드리언이 너무 기뻐했다. 에이드리언은 ‘방금 (김정남의 아들인) 김한솔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면서 ‘지금 당장 타이베이 공항으로 가서 그를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곧장 짐을 싸고 마닐라 공항으로 가서 타이베이로 향했다. (다음 날인) 2월 15일 새벽에 타이베이 공항에 도착했다.”
-타이베이 공항에서 김한솔 가족을 어떻게 만났나.
“에이드리언과 상의한 것이 있었다. 나는 검은색 티셔츠에 메이저리그 LA다저스팀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LA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LA다저스의 팬이다). 내 복장을 에이드리언이 김한솔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암호가 있었다. 김한솔이 나를 찾아 ‘스티브’라고 부르면, 그때부터 도움을 주기로 했다.”
-김한솔 가족이 당신을 잘 찾았나.
“그들은 2월 15일 이른 아침에 타이베이 공항에 나타났다. 김한솔은 나를 알아보고 암호대로 ‘스티브’라고 불렀다. 김한솔과 그의 어머니, 10대 후반의 여동생, 그렇게 3명이었다.”
-만나서 어떻게 했나.
“그때는 김한솔 가족의 행선지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나는 김한솔과 주로 대화했다. 일부러 민감한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김한솔과는 영어로 대화했는데, 그의 영어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나는 그가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미국 바비큐 등 가벼운 이야기를 했다.”
-김한솔의 어머니, 여동생과도 대화를 나눴나.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으나 조금은 대화를 했다. 내가 중간중간에 ‘괜찮은지, 필요한 건 없는지’ 여러 번 물어봤다. 어머니는 걱정 많은 표정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내게 자주 물어봤다. 여동생에게는 아이패드를 줘서 넷플릭스를 볼 수 있게 해줬다. 어머니와는 한국어로, 여동생과는 영어로 각각 대화했다.”
-김한솔이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김정은 위원장을 언급했나.
“정치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았다. 김한솔은 김정은을 거론하지 않았다.”
-김한솔이 당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보였는가.
“내가 받았던 가장 큰 느낌은 그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가벼운 얘기를 던졌다. 김한솔이 내게 ‘미국에서 사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봤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미국 음식부터 내가 여행 다닌 얘기를 해줬다. 그랬더니 김한솔이 ‘나도 미국에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국에 가고 싶다는 것이 망명이나 정치적 의미가 담긴 말로 들리던가.
“아니다. 그저 호기심에, 여행 삼아 가고 싶다는 의미로 들렸다.”
-또 다른 얘기는 없었나.
“김한솔과 편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기억나는 일은 없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김한솔이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자주 나가셨다. 할아버지와 낚시를 갔던 일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이 끝난 뒤에야 속으로 ‘그 할아버지가 바로 김정일이었구나’ 했다. 낚시 얘기 말고는 더 없었다.”
-그래도 김한솔이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김한솔은 ‘북한이 너(김한솔)를 죽이려고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내게 털어놨다.”
-그 전화가 누구로부터 온 것이었나.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김한솔이 거주하고 있던 마카오를 가족과 함께 급히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의문의, 이 전화 한 통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누군가 김한솔에게 북한 정권의 움직임을 알려준 사람이 있다면, 김한솔 가족을 몰래 돕는 북한 내부 조력자이거나, 김한솔의 신변을 꾸준히 주시하고 있던 미국과 중국 등 외국 정보기관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한솔 어머니는 어떤 모습이었나.
“초조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들을 믿고 따라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집에서 어머니·외할머니와 한국어로 말하기 때문에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도 김한솔이 가족과 하는 대화를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했다. 다만, 어머니가 걱정을 털어놓으니까 김한솔이 ‘이것이 우리 가족을 위해 제일 옳은 결정”이라면서 어머니를 설득하고 안심시키던 장면이 떠오른다.”
-에이드리언으로부터는 어떤 연락이 왔는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으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내 카드로 김한솔 가족 3명의 비행기 표를 샀다. 김정남이 암살당한 다음 날이어서 김한솔 카드로 비행기 표를 사면 여러 나라 정보기관들이 이를 파악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탑승구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한솔 가족이 여권을 꺼냈을 때, 항공사 직원이 ‘이 사람들은 탑승이 안 된다’고 막았다. 내가 항의했지만 그들은 ‘탑승이 안 된다’고 막무가내로 가로막았다. 우리는 다시 공항 라운지로 나왔다. 몇 시간 뒤 CIA 요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2명이 등장했다. 한 명은 ‘웨스(Wes)’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백인이었다.”
(이때까지 김한솔의 위치를 몰랐던 CIA가 탑승 금지 소동을 통해 그제야 그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 CIA 요원들이 김한솔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와 ‘우리는 당신 가족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그들은 그렇게 2월 15일 하루를 타이베이 공항에서 보냈다.)
-2월 16일 상황을 말해 달라.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 16일 아침 항공사 직원이 우리를 찾아와 ‘스히폴 공항으로 가는 것을 돕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표를 새로 끊었다. 그러고는 김한솔과 가족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대략 36시간 동안 타이베이 공항에서 같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상황은.
“내가 비행기를 타지 않아 구체적인 상황은 모른다.”
(CIA 요원은 김한솔 가족이 탑승한 비행기에 동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히폴 공항 입국 게이트에서 자유조선의 회원들과 인권변호사들이 김한솔 가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CIA가 김한솔 가족을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그렇게 김한솔과 그 가족은 사라졌다. 김한솔의 아버지 김정남이 사망한 사흘 뒤였다.)
-김한솔과 그 가족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나는 전혀 모른다.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이 안전하게 지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왜 김한솔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나.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그는 7시간의 인터뷰 중 세 번 울먹거렸다. 이 대목이 처음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부터 LA에서 옷가게를 했다. 그런 아버지께서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고2 때부터 학교를 마치면 어머니와 옷가게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를 잃은 장남의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그에게는 남동생 한 명이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나타난 김한솔을 보면서 내 17살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김한솔을 만났을 때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크리스토퍼 안 첫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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