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성훈 (7) 한국의 문화 담은 ‘홍오르겔’ 제작할 소명 안고 귀국

입력 2021-04-27 03:01
홍성훈(왼쪽)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94년 독일 본 클라이스사 집무실에서 스승이자 클라이스사 사장인 한스 게어트 클라이스씨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클라이스씨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클라이스씨는 “우리는 빨리 마이스터로 만들어줄 능력이 되지 않으니 다른 회사를 찾든지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계속 일하라”고 말했다. 나는 남아서 계속하겠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클라이스씨는 나무를 나르는 일 등 견습생들이 하는 일들을 시켰다. 초심으로 돌아가란 의미였다.

‘직업’을 뜻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는 ‘소명’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에서 소명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직업을 대하는 방식도 특별하다. 빵 하나를 만들더라도 최고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 유럽에 역사가 100년이 넘는 빵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번은 어느 교회의 철문을 만드는 사람에게 완성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더니 7년이 걸린다고 했다. 유럽의 교회들을 다닐 때도 똑같은 모양의 십자가와 예수상을 본 적이 없다. 교회마다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예술작품, 감동이 있었다. 그들은 특정 시간 안에 많은 성과를 내고자 하기보단 한 가지를 만들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성심껏 투자했다. 그 결과물이 예술로 승화돼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마이스터가 되기 전 5년이란 긴 시간을 준비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물며 빵도 그렇게 만드는데 하늘의 소리를 만드는 사람이 일을 허투루 해선 안 됐다. 클라이스씨 덕분에 나는 기술과 예술을 겸비한 오르겔바우로서 기본과 자질을 배울 수 있었다. 교회를 아름다운 소리로 채워 교우들의 마음을 신앙과 감동으로 가득차게 하기 위한 일이 ‘파이프오르간 제작’이란 사실을 되새겼다.

우여곡절 끝에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마이스터슐레(학교)에 입학한 뒤 역사 회계 수학 등 여러 과목의 필기시험과 100시간에 걸친 실기시험을 두 번의 시도 끝에 통과해 1997년 오르겔바우 마이스터가 됐다. 시험에 합격한 나에게 클라이스씨는 축하와 함께 이런 말을 건넸다.

“한국에 가서 당신의 문화가 담긴 ‘홍오르겔’을 만드십시오.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가장 싫어하는 건 사탄입니다. 파이프오르간은 분명 교회를 위한 하늘의 소리지만 이를 짓는 과정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겁니다.”

그땐 잘 몰랐으나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을 만들며 그의 당부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클라이스씨는 파이프오르간이 단순히 악기가 아니라 영적 싸움에 무기로 쓰인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내가 받은 소명도 분명했다. 한국에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마지막 통로이자 영적 전쟁의 병기로서 파이프오르간을 짓고 더 많은 사람에게 들리게 하는 일이다.

1997년 12월, 나는 독일에서의 12년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텐데 왜 한국으로 왔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엔 나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 한국에서 파이프오르간은 지금보다 훨씬 더 생소한 문화였기에 막막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한국으로 이끄셨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