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모래알 나비

입력 2021-04-26 04:05

문화예술이나 체육 분야에서 엘리트 양성을 위해 대표 선수를 선발하고 집중 지원하는 방식이 우리는 익숙하다. 한국 사회가 패션 디자이너 지원을 시작할 때도 누구나 알만한 디자이너를 우리도 키워보자는 기대가 암묵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스타플레이어가 의외의 지점이나 때로는 다소 등한시하던 곳에서 등장하는 광경이 이젠 낯설지 않다.

패션 전공자들과 모여 앉아 외국 사람들이 알만한 한국의 대표 브랜드를 꼽아볼 때가 있다. 그러면 ‘준지’나 ‘우영미’ 정도를 자신 있게 얘기하고 그다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서 외국인에게 한국 패션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면 특정 브랜드를 떠올리는 대신 몇몇 콘셉트를 대답한다. K팝 스타일, 동대문 스타일, 스트리트 스타일 그런 식이다.

아이가 색색의 모래를 쏟아 놓고 놀 때 가끔 어떤 형상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자잘하게 다른 색들이 섞였지만 어떤 한 가지 색이 많이 모일 때 물고기나 멋있는 나비 형상을 이루기도 한다. 지금 한국 패션이 그런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표 선수를 양성하려고 열심히 지원해왔지만, 화려한 선수들이 아닌 동대문과 인터넷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야로 고민하며 만들어 낸 작은 ‘엣지’들이 모여 뭔가 그들만의 색을 이루고 있다. 내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어느 분야보다 모래알 같았던 작은 가게들이 거대 플랫폼 아래에서 집합적인 경쟁력을 만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재 한국 패션의 경쟁력은 좋은 품질과 착한 가격인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샤넬보다 한국의 자라(ZARA)를 기대하는 게 현실적으로 더 가깝고, 한국의 자라도 효율로 무장한 대기업 대신 에이랜드나 지그재그, 무신사같이 수많은 작은 브랜드들이 모여 경쟁하는 거대 편집 브랜드가 이뤄내고 있다. 앞에 만들어진 길을 외면하고 더 멋있는 길을 만들겠다고 어려운 걸음을 딛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윤소정 패션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