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목공을 배운 후 1988년부터 플라이터사에서 3년 반의 도제과정을 시작했다. 파이프오르간을 알아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즐거웠다. 그러나 끝날 날이 다가올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뮌스터 시청에서 약속한 기한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약속기한 반년 전쯤부턴 울며 기도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왜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한 번은 교회 수련회에서 기도하는데 평생 그렇게 운 적이 없을 정도로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됐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그때 서울의 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회를 새로 건축하면서 파이프오르간을 지으려고 하는데, 당시 시무하던 목사님께서 내가 제작 관련 일들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교회를 다닌 적도 없고 어떤 인연도 없었다. 지금도 어떤 연유로 연락이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 교회가 클라이스 파이프오르간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터라 나는 가장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던 세계 최고의 파이프오르간 제작사인 ‘클라이스’를 찾아가게 되었다. 때마침 클라이스사도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눈을 돌릴 때였다. 한국에 파이프오르간을 지으면 이를 수리하고 조율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때 도제 과정을 밟던 내가 찾아온 것이다. 클라이스사는 나를 받아줬고 곧바로 독일 본에서 새로운 비자를 받아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뮌스턴 시청과 약속했던 기한인 1991년 9월의 일이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전 세계 파이프오르간 도제생의 꿈이자 외국인 도제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클라이스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제시험에 합격했을 때 가장 먼저 축하해주셨던 문성모 목사님(현 강남제일교회)께서 독일에서 늘 함께 기도해주셨다. 위기 때마다 절실하게 기도하고 인도받았음을 느꼈다.
91년 10월부터 클라이스사에서 정식 도제로서 삶과 5년간의 마이스터 과정을 시작했다. 매일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예술을 향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클라이스사 사장인 한스 게어트 클라이스씨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파이프오르간을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클라이스 사장은 그 후로 나를 곳곳의 제작 현장으로 보냈다. 한 번 갈 때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반년을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큰딸은 쑥쑥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5년이란 실습 기간은 좀 더 빨리 마이스터가 되고 싶은 나에게는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마이스터 과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클라이스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평생 해야 하는데, 학위를 좀 더 일찍 받을 수 있도록 마이스터슐레(학교)에 빨리 입학하면 안 될까요.” 그가 1주일 후 건넨 답변은 “여기서 정도를 밟고 계속 일하든지 아니면 당신의 생각을 받아줄 다른 곳을 찾아가라”였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