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과 ‘갠톡’ 주고받는 초등생 딸… 설마 n번방?

입력 2021-04-24 04:02 수정 2021-04-27 16:58
외부와의 접촉이 줄고 디지털 이용시간이 늘어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아동·청소년들은 온라인 세상 속 관계 맺음에 거리낌이 없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이 위험하다는 경고가 계속되지만, 아이들은 각종 게임이나 SNS 등 어디에서나 ‘랜선 친구’들과 손쉽게 대화(채팅)하고 있다. 사진은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 게티이미지

초등 5학년 딸을 둔 신모씨는 지난 겨울방학 딸과 대화를 나눈 뒤 수일간 밤잠을 설쳤다. 아이는 두어 달 전 시작한 ‘제페토(ZEPETO)’라는 게임을 그만하겠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제페토는 원격수업으로 외로워하던 딸이 직접 꾸민 아바타로 노는 게임이라며 친한 친구들도 다 한다고 졸라서 허락한 게임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던 게임을 스스로 끊었다는 말에 신씨는 반가우면서도 한편 불안했다. 신씨가 이유를 캐묻자 아이가 들려준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이가 아바타 팔로어를 늘리기 위해 앱 채팅을 통해 이름 모를 친구들을 사귀었고, 편의점에서 기프트카드를 사서 게임 속 친구들에게 선물 이벤트를 하거나 원하는 아이템 거래에 썼다는 것이다.

‘소통’의 대가는 매우 컸다. 겨우 두 달 사이 아이는 세뱃돈으로 받은 10여만원을 다 썼고, 그제야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고 했다. 심지어 약속한 아이템이나 대가를 받지 못하고 되레 협박을 당하거나 욕먹는 등 일종의 ‘사기’까지 당하며 상처도 입은 듯했다. 온라인에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고, 알아들은 줄 알았던 아이가 이런 일을 벌였다니.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날 밤 잠자리에서 “실은 사진을 보낸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아바타 역할놀이 코너에서 갠톡(개인적인 대화)을 주고받던 상대방이 얼굴을 궁금해 해서 ‘셀카’도 보내고 몸 사진도 보냈다는 것이다. 아이는 “영상 대화하면서 상대방이 ‘이상한 행동’을 하라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진짜 모르겠다”며 울먹였다. 신씨는 “n번방이니 ‘그루밍’이니 하는 사건들이 평범하고 순진한 초등학생 딸내미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새하얘졌다”며 “화를 내거나, 큰일이 났다는 식으로 대응했다가 아이가 더 큰 두려움에 빠질 것 같아 아무 말도 못 한 채 몸만 떨었다”고 말했다.

유튜브·SNS·게임 어디든 ‘채팅공간’

신씨가 받은 충격이 컸던 가장 큰 이유는 ‘내 아이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제어 프로그램을 깔아 관리도 하고, 문제가 많다는 카카오톡도 허용하지 않았던 터였다. 가정생활이나 학교생활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름대로 옳고 그름도 잘 판단하는 아이였으며, 집에 어른 없이 혼자 남겨져 있는 경우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 속 아이들의 디지털 노출 나이가 크게 낮아지고, 이용 시간은 증가하면서 신씨와 같은 사례는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학부모들이 많이 이용하는 지역 커뮤니티나 맘 카페 등에서는 아이들이 즐겨하는 게임 등에서 신씨의 딸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불안감을 느낀다며 고민을 털어놓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실은 실제 통계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난해 12월 서울시와 사단법인 탁틴내일이 12~19세(서울 초등학교 5학년~고등학교 3학년) 16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디지털 성범죄 실태조사 결과 응답자 3명 중 1명(36%)이 메신저나 SNS 등을 통해 낯선 사람으로부터 쪽지나 대화 요구를 받아본 적 있다고 답했다.

아이들이 낯선 이와 대화하는 창구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n번방 사태로 주목받은 텔레그램이나 디스코드와 같은 채팅 앱이나 카카오톡 오픈 채팅 같은 메신저 프로그램만이 아니다. 이외에도 유튜브나 SNS 댓글창, 게임 속 채팅 등 아이들은 어디서든 ‘대화’를 하고 있었다. 서울시 실태조사에서 특히 12~13세 초등학생들의 경우 응답자의 30%가량은 ‘게임 채팅’을 통해 낯선 이의 연락을 받았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채팅 범위가 통계보다 훨씬 광범위할 것으로 분석한다. 36%라는 수치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대화 요구를 받은 경우’인데, 여기엔 아이들이 스스로 참여하거나 찾아 들어간 채팅 등은 포함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게임을 하며 대화를 하던 사이, 유명 유튜브 채널의 ‘반모(반말모드) 이벤트’에 참여한 사이, SNS에서 팔로어를 늘리기 위해 쌓은 인맥 등은 아이들에게 더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랜선 친구’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등을 지원하는 ‘서울시 찾아가는 지지동반자’의 이희정 팀장은 23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즐겨하는 게임일수록 관계를 맺는 방식은 너무나 자유롭고 다양하다”면서 “나쁜 앱이나 위험한 게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어디에서든, 누구와든 아이들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에 오히려 경계 푸는 아이들

온라인에서 맺는 관계에 대해 아이들의 경계심이 낮은 경향도 있다. ‘익명’인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라서 위험하다는 인식과 달리 아이들은 온라인에서 자신 또한 ‘익명성’으로 보호받는다고 생각해 쉽게 많은 것을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90% 이상이 온라인상에서 개인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위험하다고 인식했지만, 낯선 사람에게 대화 요구를 받은 아이 중 64%는 실제 개인정보를 알려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문제는 이런 채팅 자체를 막거나 사전에 검증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게 현실이라는 데 있다. 청소년인터넷지킴이 모니터링단 활동을 했던 A씨는 “게임이든 어디든 대화가 가능한 공간에선 너무 쉽게 상상도 못 할 채팅이 이뤄진다는 걸 알게 됐다”며 “부모들은 어떤 특정한 앱이 문제다, 이런 식으로 잡고 싶어하지만 그건 너무나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말했다. 더욱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온라인 세상과 현실의 구분은 더 흐려지고 있다. 신씨 딸이 빠졌던 ‘제페토’의 경우 아바타를 통해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일을 온라인에서 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MZ세대 사이에선 갈수록 더 주목받는 추세다.

그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지동반자 이 팀장은 “피해사례를 들여다보면 아이들은 원하는 만큼 관심받지 못한 아주 짧은 순간에 잘못된 관계에 빠진다. 예측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온라인에서의 일들을 무작정 배척하기보다 아이들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부모에게 알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 원론적인 얘기이지만, 가장 중요하다”며 “혹 피해를 보았을 땐 반드시 그것을 어른과 함께 해결하도록 유도해 범죄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이후 검증할 능력을 갖추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