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룡입니다. 인류멸종 막으려 대선 출마 고민중입니다”

입력 2021-04-22 00:06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로 나섰던 ‘기후 0번’ 김공룡과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이 지난해 7월 국회 앞에서 ‘기후위기 비상사태 선언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는 모습. 청년기후긴급행동 제공

‘기후 0번 김공룡’. 지난 4·7 재보궐선거에 출마한 이들 중 낯선 번호와 이름에 젊은 세대의 관심이 집중됐다. 공룡 탈을 쓰고 기호가 아닌 ‘기후’ 0번을 외친 이 후보는 시민단체 청년기후긴급행동이 만들어 낸 가상의 서울시장 후보였다. 김공룡은 출마 당시 “나처럼 멸종하고 싶지 않다면 기후문제에 하루빨리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성세대 눈에는 장난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펭수’에 익숙한 세대들은 기후변화를 가장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는 이 가상 후보의 신선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국민일보는 ‘지구의 날’을 하루 앞둔 21일 김공룡의 정책 보좌관으로 소개된 오지혁(21) 청년기후긴급행동 대표를 통해 김공룡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 대표는 가상의 후보였던 김공룡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줬다. 오 대표는 “기후위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인이 없어 김공룡이 내년 대선 출마도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고 귀띔했다.

오지혁 청년기후긴급행동 대표가 2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김공룡을 든든하게 떠받치는 청년기후긴급행동의 활동가 70명 전원은 MZ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의 합성어)다. 이들이 바라보는 한국은 더 이상 기후위기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다. 매년 극심해지는 여름 폭염, 지난해 46일 동안이나 지속됐던 장마는 한국에도 기후위기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2019년 서구권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휩쓸었던 ‘기후파업 시위’는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됐다. 기후파업 당시 세계 곳곳에선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라”는 요구가 거셌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빠지고 직장인들은 회사에 결근한 채 거리로 나섰다.

김공룡은 “전 세계적으로 암울한 기후변화 전망들을 접하며 절망을 넘어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을 경고하는 연구들이 나오는데도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이 계속 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공룡은 활동가와 함께 지난해 1월 조명래 당시 환경부 장관을 찾아가 “환경부가 기후위기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항의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인도네시아 석탄발전소 투자 결정을 앞둔 한국전력공사 이사진을 찾아가 석탄 투자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꾸준한 기후 관련 활동은 정치 이슈에 묻히기 일쑤였다.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김공룡은 “박영선, 오세훈 두 거대 양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기후위기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에 나설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오 대표는 “군소정당에서 기후 공약이 나오기는 했지만 결국 ‘기후변화는 ○○○ 후보다’ 이렇게 떠오르는 정치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부연했다. 김공룡은 3주 넘게 준비를 한 뒤 출마선언을 했다. ‘기후변화 하면 정치인 김공룡’이라는 메시지를 심어주는 게 목표였다.

직접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현실과 마주하니 더 암담했다. 기후변화는 유권자에게도, 정치인에게도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기후변화가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사회 의제가 된 것과 대조적이었다. 16년 집권을 끝으로 오는 9월 정계 은퇴를 선언한 앙겔라 메르켈 총리 이후 리더십을 고민하는 독일에서 녹색당이 야권 지지율 1위 정당으로 성장한 것도 단적인 예다.

김공룡은 “서울시장 선거가 ‘생태주의’도 아니고 온통 ‘생태탕’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내곡동 네곡동 관심 없다. 인간 멸종 막기 위해 공룡이 나섰다’는 선거 캐치프레이즈가 여기에서 나왔다. “탄소제로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서울시의 교통 시스템, 도시 환경, 주거 형태, 먹거리 등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이야기했어야 했다”고 김공룡은 설명했다.

선거는 끝났지만 김공룡과 활동가들은 가덕도신공항 사업을 백지화하기 위한 팀을 운영 중이다. 김공룡은 “여당이 4·7 재보선을 이기기 위해 낡디낡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꺼내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공항 논의를 본격화하기 불과 3~4개월 전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여권이 또다시 산을 깎고 바다를 매립해 활주로를 까는 ‘환경 파괴’를 선택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김공룡은 한국사회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다음 문장을 마지막 인사로 남겼다. “이제 인간도 멸종위기종이다. 지금의 정치·경제체제, 생활양식을 기후변화에 맞춰 변화하지 않는다면 나는 매번 선거 때마다 다시 출몰할 것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