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성훈 (5) 어렵게 목공소 찾고 나니 노동비자 없어 발만 동동

입력 2021-04-23 03:06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 장인이 1990년 독일 뮌스터 플라이터사에서 견습생으로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배우고 있다.

장우형 박사의 도움으로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배우기 위해 ‘플라이터’라는 회사를 처음 찾아갔다. 플라이터에선 목공을 1년간 배우고 오면 도제 과정에 받아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목공이라곤 해본 적도 없었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1개월 안에 목공소를 찾아야 했다.

인터넷도 없고 독일어도 잘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도 끝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에 버스를 타고 아무 곳에나 내려 목공소를 찾아다녔다. 너무 절박하고 비참한 마음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를 헤매던 때였다. 어디에 내렸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앞을 봤는데 들판에 집이 한 채 있었다. 무작정 들어가 목공소를 찾고 있다고 하니 그 주인이 “여기가 목공소”라고 했다. 그 목공소의 이름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예수는 목수였다’였다. 그 당시엔 아무 생각도 안 났지만, 나중에야 하나님께서 이끄셨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다. 당시 비자를 담당했던 뮌스터시청에선 학생비자로 왔기 때문에 노동비자를 다시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노동비자를 받기 위해선 한국에 가야 했고, 가더라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당시에 파이프오르간 제작은 독일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시청에서 조건을 제시했다. 도제까지만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내 비자를 담당했던 공무원이,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인 나를 많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하는 나에겐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목공 1년, 도제 3년 반까지 4년 반의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1주일 후인 1987년 3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아내를 맞이했다.

당시엔 어쩔 수 없이 파이프오르간을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선 내게 지속적으로 파이프오르간을 만날 기회를 주셨다. 중학교 2학년 땐 내가 다니던 연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이 지어졌다. 2명의 미국인 제작자를 보며 나는 그들이 ‘천사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이 악기를 짓는 일은 천사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울시립가무단 단원으로 연습하고 공연했던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는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 있었다.

목공을 배우던 중 견습생으로 파이프오르간 제작 현장에 견학하러 갔을 때다. 파이프오르간의 작동 장치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우주선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옛날부터 어떤 한 가지만 하는 게 싫었다. 그런데 파이프오르간은 촘촘한 공학기술이 더해진 음악이었다. 모든 요소의 총체적인 결합체인 파이프오르간이 나와 잘 맞는다고 느꼈다.

또 한번은 뮌스터에 있는 한 대성당에서 수사들이 파이프오르간 선율에 맞춰 노래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타지의 독일인들 속에서 멜빵바지 작업복을 입은 내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독일 최고의 파이프오르간 제작사인 ‘클라이스’에 들어가기를 꿈꾸게 됐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