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 ‘태극 몸짓’, 올림픽에 설 그날을 위해

입력 2021-04-21 04:06
한국 아티스틱스위밍 남자 1호 선수 변재준이 19일 경기도 성남 종합스포츠센터 수영장에서 역동적인 동작으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성남=이한결 기자

“재준아. 손을 더 높게 들고 턱을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돌려봐.”

19일 오후 6시 경기도 성남 종합스포츠센터. 5m 깊이의 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에서 한여름 무더위처럼 습기가 뿜어져 나왔다. 실내수영장 전광판이 가리키는 습도는 84%. 가만히 있어도 땀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이곳에서 송지현 스타싱크로클럽 코치가 수영장 주변을 뛰어다니며 선수 2명의 동작을 바로잡고 있었다.

송 코치의 지휘에 따라 수면 위아래를 오가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선수들. 이들은 지난 2월 온라인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된 국제수영연맹(FINA) 아티스틱스위밍 월드시리즈 1차 대회 혼성 듀엣에서 은메달을 합작한 성남 동광고 3학년생 변재준과 2학년생 김효빈이다. 변재준은 한국 아티스틱스위밍에서 희귀한 남성 선수로 6년째 물살을 가르고 있다.

2016년 대한수영연맹에 ‘1호’로 등록된 아티스틱스위밍 남성 선수. 그 이력만큼 가족력도 특별하다. 변재준의 아버지는 1990년대 ‘발라드의 황제’로 불린 가수 겸 작곡가 변진섭, 어머니는 한국 아티스틱스위밍 국가대표였던 이주영 스타싱크로클럽 감독이다. 변재준을 지도하는 송 코치는 캐나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이 감독과 동시대에 활동했다.

음악가와 운동선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변재준은 훈련을 마친 뒤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에 종종 어머니를 따라 아티스틱스위밍 경기를 관전했다. 그때만 해도 신기한 운동이라고만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2015년 10월 어머니의 제안을 받고 정식으로 운동을 시작했다”며 “이제는 물속에서 움직임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남성 선수는 아직 동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 여성 선수들처럼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티스틱스위밍의 옛 명칭은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이다. 한국에서는 ‘수중 발레’로도 불린다. 국제수영연맹(FINA)은 예술성과 경기 요소를 더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2017년부터 아티스틱스위밍으로 개칭해 사용하고 있다. 아티스틱스위밍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부터 오는 7월 도쿄올림픽까지 정식종목 지위를 이어왔지만, 여성에게만 출전을 허락했다. 남성, 혹은 혼성 듀엣 종목 신설은 2028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이후의 판단으로 미뤄져 있다.

만 18세인 변재준이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7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이마저도 기약할 수 없는 목표다. 여전히 여성만의 종목으로 여겨지는 아티스틱스위밍은 남성이 출전할 대회도 희박할 만큼 저변이 부족하다. 남성 선수가 탈의실과 샤워장을 찾지 못해 경기장 밖을 헤매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변재준은 성남 동광고 후배인 김효빈(오른쪽)과 지난 2월 국제수영연맹(FINA) 아티스틱스위밍 월드시리즈 1차 대회 혼성 듀엣에서 은메달을 합작했다. 성남=이한결 기자

변재준에게도 지난 6년은 사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변재준은 “처음으로 출전한 대회가 2018년 캐나다오픈이었다. 당시 200여명의 출전자 중 나를 제외한 전원이 여성이었다”며 “경기장의 남성 라커룸이 여성 선수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다. 대회 조직위원회가 나를 위해 별도의 탈의실을 마련해줬다”며 웃었다. 변재준은 당시 성남 동광중에 함께 재학했던 동갑내기 이가빈과 함께 듀엣에 출전해 1위를 차지했다.

낯설고 외로운 길이지만, 변재준은 담담하게 걸어왔다. 늘어나는 활동 기간만큼 수상실적이 따라왔고 “재능이 있다”는 칭찬도 들려왔다. 송 코치는 예술성과 창의성을 변재준의 강점으로 꼽는다.

변재준은 “남성 선수에게 아티스틱스위밍은 여전히 도전이다. 유연성과 섬세한 안무에서 여성에게 뒤처진다”면서도 “순간적으로 물 밖으로 도약하는 부스트, 동료를 들어 올리는 리프트처럼 힘을 요하는 동작에선 남성에게 유리한 점도 있다”고 소개했다.

고등학생인 변재준의 하루는 길다. 훈련은 방과 후에 편성돼 있다. 아티스틱스위밍 남성 선수로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국내 상황을 감안해 현대무용으로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오후 9시30분에 훈련을 끝내고 현대무용 강습을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는 30분이 변재준에게 하루 중 유일하게 주어진 휴식시간이다.

변재준은 그 짧은 시간 음악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랜다. 요즘은 뮤지컬 곡에 심취했다. 예술적 감각을 키울 수 있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를 수 있어서다. 변재준의 스마트폰 음악 애플리케이션에는 국내 창작 사극 뮤지컬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의 수록곡이 가득하다.

변재준은 “뮤지컬 곡을 큰 소리로 부르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가수 박효신의 ‘그날’ ‘숨’ ‘야생화’도 선호하는 곡으로 꼽았다. 아버지의 히트곡에서 좋아하는 곡을 물었을 땐 잔잔한 곡조의 ‘그대 내게 다시’가 가장 먼저 나왔다.

“아버지는 롤모델이에요. 은퇴 이후엔 뮤지컬 배우를 꿈꾸고 있어요. 아버지처럼 멋진 스타가 되고 싶습니다. 그 전에 선수로서 한국을 빛내고 싶어요.” 아들의 꿈을 들은 이 감독은 “횃불 같은 선수가 되길 바란다”고 응원했다.

성남=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