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여의 서울시립가무단 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내가 느끼기엔 거의 놀이처럼 노래하고 연기하는 일이 직업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땐 파이프오르간이 뭔지도 잘 몰랐다.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무대에서 그저 노래와 춤, 연기 연습만 했다. 황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마음 한편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연이 될 가능성은 작아 보였고, 40세가 돼서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5년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란 작품을 위해 9개월간 긴 연습을 하게 됐다. 이 작품이 가무단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자,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는 동기가 된다.
당시 나는 엑스트라였지만 수개월 함께 연습하는 시간 동안 많은 걸 깨달았다. 작품 속 주인공인 유대인 테비예가 하나님께 마치 대화하듯 말을 건네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웠다. 나도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에서 대화하고 싶단 마음에 연습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마도 하나님께선 그 작품을 통해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신호를 주신 게 아닐까 싶다. 봉산탈춤, 장구, 대금 등 국악부터 기타, 뮤지컬 등 서양음악까지 예술적 기반을 쌓았고 충분히 놀았으니 이제 진짜 소명을 찾아 떠나라고.
이 작품을 끝으로 가무단을 그만두고 유학 준비에 나섰다. 당시 해외여행이 막 풀리면서 유럽을 다룬 책들이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나 역시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1985년 11월에 서울 종로구에 있던 한국일보 대강당에서 기타 연주회를 열만큼 관심이 컸던 나는 ‘독일에서 기타를 배우면 어떨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타로 대학 원서를 넣기엔 실력이 좀 부족했다. 고민하다가 우회로 원서를 넣은 곳은 독일 뮌스터대학 지질학과였다. 그때 독일 대학엔 외국인에게 필수로 배정해야 하는 인원수가 있었다. 1년간 어학을 배운 후 일정 조건을 통과하면 입학을 허가해주는 식이었다. 독일어는 한 글자도 몰랐고 지질학과는 생소했지만, 무작정 원서를 넣고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그리고 공연 때마다 입었었던 탈춤 의상과 기타를 양손에 든 채 1986년 1월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독일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에서 13시간이 넘는 동안 나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이런 결정을 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독일에 가겠다고 했을까, 말 한마디 못하는데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그 결정이 내 결정이 아니고, 더는 놀기만 좋아하는 나를 가만둘 수 없으셨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오래 뒤의 일이었다.
정리=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