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공짜는 없어요. 뭐든지 알아서 잘 찾아내야 하죠.”
남자프로배구 최초의 외국인 감독으로 대한항공에 부임해 첫 통합우승(정규리그 1위·챔피언결정전 우승) 영광을 안긴 로베르토 산틸리 감독은 17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챔프전 5차전이 끝난 뒤 이렇게 입을 뗐다.
‘공짜는 없다.’ 5차전까지 치열하게 펼쳐진 대한항공과 우리카드의 챔프전, 나아가 대한항공의 한 시즌을 함축한 한 마디였다. 대한항공은 베테랑 주장 한선수가 “5차전이 되고서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카드의 기세에 눌려 있었다. 챔프전 1·3차전에선 0대 3으로 대패했다.
대한항공을 위기에서 구해낸 건 과감한 선수 기용이었다. 대한항공은 5차전 3세트에서 3-7로 뒤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지친 한선수와 요스바니를 빼고 임동혁과 유광우를 넣었다. 산틸리 감독이 “모 아니면 도였다”고 떠올릴 정도의 모험수는 승부처에서 적중했다. 두 선수는 코트 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으며 3세트, 나아가 챔프전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4차전에선 곽승석을 빼고 정지석-요스바니를 레프트로, 임동혁을 라이트로 기용해 3명이 득점을 책임지는 공격적인 라인업으로 승리를 챙겼다. 진성태의 부상으로 센터진이 약화되자 레프트 손현종을 빠르게 훈련시켜 센터로 투입했다.
이런 과감한 수가 통했던 건 ‘외국인’ 산틸리 감독이 시즌 내내 편견 없이 선수를 기용해 비주전들이 성장할 수 있는 장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그 토대 위에서 챔프전 내내 환상적인 디그를 선보인 리베로 오은렬이 성장했고, 임동혁도 토종 선수 득점 4위에 오를 정도로 잠재력을 입증했다. 약화된 센터진은 조재영 진지위처럼 출장 기회를 자주 잡지 못한 선수들의 기량 발전으로 메꿔낼 수 있었다.
‘다른 것’에 대한 반감도 만만찮았다. 승부욕이 넘친 산틸리 감독은 과도한 항의로 수차례 제재를 받았다. 챔프전에선 상대 에이스 알렉스와 언쟁을 벌였고 중요 순간 상대 맥을 끊어놓는 과한 제스처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연습경기 위주의 훈련 방식도 기존과 달라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프로는 결과로 말한다. 숙원인 통합우승을 달성한 건 공짜가 아니다. 산틸리 감독과 그를 선임한 대한항공, 그리고 선수단이 함께 이룬 성과다. 산틸리 감독은 “세계 배구는 하나의 전통만 따르는 게 아니다. 여러 다른 색깔들을 보며 발전하는 것”이라며 “처음엔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다른 방식이 한국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 믿음을 얻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1년 계약기간을 마친 산틸리 감독은 한국 땅에서 도전을 마치고 ‘윈윈’한 대한항공과 작별할 예정이다. 대한항공은 산틸리 감독과 마련한 변화의 토대를 다른 외국인 감독 선임으로 이어갈 방침이다. 다음 시즌 대한항공의 배구는 어떤 색깔로 변할까.
인천=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