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1시 서울 은평구 녹번동 래미안베라힐즈 아파트 단지 내 달빛공원. 가로 12m, 세로 4m의 LED 전광판을 단 5t 트럭이 실내악 무대가 돼 아파트 주민들을 맞았다. 서울시향 김진근 악보전문위원의 사회로 제1 바이올린 부수석 주연경을 비롯해 바이올린 김미경, 비올라 안톤 강, 첼로 박무일, 베이스 장승호로 이뤄진 현악5중주가 연주를 시작했다. 공연을 앞두고 공원 내 벤치에 앉거나 주변에 선 주민들은 아름다운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오전 9시부터 트럭을 세우고 음향 등을 점검한 백지혜 사회공헌팀장 등 서울시향 관계자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박이 섞인 비가 조금씩 내리는 바람에 트럭 위에 쳤던 텐트를 콘서트 직전에 비가 그치면서 거뒀기 때문이다. 서울시향 현악5중주는 홀베르크 모음곡 작품 40 중 제1곡 프렐류드를 시작으로 차이콥스키의 현악을 위한 세레나데 4장조 작품 48 중 2악장 왈츠,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카를로스 가르델의 탱고 ‘포르 우나 카베사’ 등을 차례로 선보였다.
공연 시작 전에 60명 정도이던 주민들은 콘서트가 진행되면서 늘어나 80명 정도가 됐다. 주민 자치회와 부녀회 관계자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모인 주민들 사이를 다니며 체온을 재거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달라”고 말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소 쌀쌀한 날씨 탓에 공원을 바라보는 ‘로열석’ 아파트 동에선 베란다 창문을 열고 음악을 듣는 주민들도 보였다. 한 가족은 베란다에서 고기를 굽고 식사를 하며 배경음악처럼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한 부부는 커피를 마시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공연 시작 후 30분 정도 됐을 때 빗방울이 떨어져 5분 정도 공연이 중단되고 악기 보호용 파라솔이 쳐졌지만 금세 그쳐 공연이 재개됐다. 4월의 꽃샘추위와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오랜만에 라이브로 듣는 클래식 음악을 1시간가량 즐겼다.
주연경 부수석은 공연을 마친 뒤 “우리동네 음악회가 작년에는 코로나19로 대부분 취소돼 안타까웠다. 올해는 실내악 이동식 공연으로 시민들에게 연주를 들려드릴 수 있어 기쁘다”며 “주민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연주자들도 즐겁게 연주했다”고 말했다.
이날 음악회는 서울시향이 클래식 공연의 대중화 및 시민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매년 진행하는 ‘우리동네 음악회’의 일환이다. 특히 ‘우리동네 음악회 실내악’은 단원들이 소규모 앙상블을 구성해 25개 자치구의 병원, 학교, 문화·복지 시설 등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지만, 지난해엔 코로나19로 대부분 취소됐다. 공연 준비와 취소를 반복해야 했던 백 팀장은 올해 코로나19의 영향을 적게 받는 실외 공연으로 ‘실내악 이동식 공연’을 추진했다. 선거 때 사용되는 대형 유세 트럭을 빌려 이동식 무대로 활용하기로 하고 트럭을 래핑한 뒤 ‘우리동네 음악회’ 로고와 함께 서울시의 찾아가는 문화사업 로고 ‘문화로 토닥토닥 마음방역차’라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코로나19 이후 예술단체들이 아파트 단지를 찾아가 공연하는 ‘베란다 콘서트’가 종종 이뤄지지만 대형 트럭을 무대로 활용한 것은 서울시향이 처음이다.
서울시향은 서울시와 25개 자치구에서 ‘실내악 이동식 공연’ 신청을 받은 뒤 5t 트럭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 등을 고려해 장소를 결정했다. 상반기에는 다음 달 16일까지 한 달간 은평구와 영등포구 등 5개 자치구 내 아파트 단지에서 총 13회 공연한다. 첫날인 17일에는 래미안베라힐즈 아파트에 이어 오후 5시 신사1동 한신휴 아파트에서도 공연했다. 강동균 래미안베라힐즈 입주자 대표는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은커녕 영화도 보러 가지 못했다”면서 “서울시향이 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까지 와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 의견을 들은 뒤 바로 신청했다. 많은 주민이 공연을 원했다”고 전했다.
백 팀장은 “공연이 끝난 뒤 주민들이 찾아와 고맙다며 여러 번 인사했다. 한 주민은 ‘코로나19로 우울했는데, 서울시향의 선율을 들으며 마음이 한층 밝아졌다’며 눈물을 글썽였다”며 “우리동네 음악회를 오랫동안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 탓에 연주자와 주민 모두 더 절실하게 음악을 받아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