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의 지금 미국은] 美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 文정부 비난 일관… 의미 퇴색

입력 2021-04-19 04:02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가 15일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의회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의 대북전단금지법 관련 청문회를 규탄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8년 2월 11일 미국 유대인의 중심이고 지구촌 인권의 상징이며 의회 내 유일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톰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이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랜토스의 유산을 의회에 남기기 위해 1983년 설립된 ‘의회 인권 코커스’를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로 개명하고 위원회 활동 업적을 매년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연방 의회의 인권 관련 기구가 논의(Caucus) 기구에서 실행(Commission) 기구로 바뀐 것이다. 동시에 위원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양당을 대표하는 공동의장제로 운영하도록 했다. 지금 공동의장은 공화당의 크리스 스미스 의원과 민주당의 제임스 맥거번 의원이다. 스미스 의원은 공화당 내 최고참(뉴저지주 의정 활동 40년)으로 도널드 트럼프조차도 감히 건들지 못한 거물이다. 맥거번 의원은 민주당 내 인권과 관련해 가장 많은 성과를 낸 매사추세츠주의 26년째 중진이다.

휴전선 접경지역 주민의 민원으로 한국 국회에서 제정한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그 논란이 워싱턴 의회로까지 왔다. 사실 그 논란에 워싱턴이 반응한 것이 아니고 그런 입법에 영향을 받는 개인이나 단체가 의회를 찾아와 다뤄줄 것을 요청(로비)한 것에 워싱턴이 반응했다. 대한민국이 법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말에 반응을 보인 워싱턴이 미처 따져보기도 전에 이슈가 됐다. 일부 언론의 과장 확대 보도 때문이다. 청문회는 사실을 좀 따져보자는 과정인데 청문회 개최 여부가 이미 내용을 규정한 것으로 되고 말았다.

이에 한국의 입법부뿐만 아니라 정부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입법을 요청한 접경지역 주민들은 더욱 분개했다. 대북전단 살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무력 충돌 가능성을 야기하는 상황이라고 항변했다. 워싱턴 한국대사관은 이 법안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인권을 침해하는 방식을 규제하는 입법임을 설명했고,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할 워싱턴이 아니었다. 당초 랜토스 인권위는 청문회 개최에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한국 측이 인권위 기능과 권위에 대해 대응하면서 이슈가 커졌다.

청문회를 개최하는 랜토스 인권위는 초당적 기구다. 청문회를 개최하려면 여야가 합의해야 한다. 전단 살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랜토스 인권위의 공화당 공동의장인 스미스 의원을 접촉한 것은 지난해였다. 이 문제로 청문회를 개최하는 일에 민주당 공동의장인 맥거번 의원 측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맥거번 측은 한국 국회의 입법 배경과 취지를 알아본 것으로 알려졌다. 청문회 개최를 위한 공동의장 간 협의가 지연된 배경이다.

조 바이든 정부의 외교와 안보의 주 대상은 중국이고, 그 핵심은 인권과 동맹임이 반복해 강조됐다. 최근 들어 바이든 정부는 의회에서 중국의 인권 문제를 다뤄주길 바랐고 그 시작은 랜토스 인권위다. 중국 문제를 주 안건으로 다루고 한국 관련은 그 뒷전에 붙이는 방식의 청문회를 예상했다. 청문회가 4월 중순을 안 넘길 것이란 말이 흘러나온 것은 지난달 10일쯤이다. 하지만 청문회 개최에 대해 한국 정치인들과 한국 정부의 민감한 반응이 오히려 불을 지폈다. 그렇다면 사실관계를 공개적으로 좀 따져봐야겠다는 분위기로 변했고, 랜토스 인권위의 기능과 권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문제 제기를 알게 되고서는 짜증스러운 분위기가 됐다. 이 사안과 관련해선 스미스 의원의 주장에 무게가 더해졌다(청문회 후 기자들과의 질의 응답에서 스미스 의원은 한국 쪽 반응에 대해 자신의 인권 관련 성과를 강조하면서 “내 지역구의 한인들은 이 같은 나의 활동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설명했다).

청문회 관심의 초점은 누가 증인으로 나오는가다. 청문회에 내세울 증인들의 면면을 짐작하는 일은 어려운 게 아니다. 보수 우익 쪽의 4명은 공화당 측에서 내세운 증인이고, 워싱턴 퀸시연구소의 제시카 리 선임연구원과 탈북자 지원 활동가인 전수미 변호사는 민주당 측이 추천했다. 지난 15일 진행된 청문회는 사실 내용을 규명해 보는 측면에선 실패작이다.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을 하려고 등장한 증인들의 진술이 문재인정부를 비난하는 것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청문회 개최를 요청한 측의 저의가 너무 쉽게 드러났다. 폭스뉴스 단골 출연자인 극우파 논객인 고든 창 변호사와 주러시아 한국대사를 역임한 이인호씨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 문제가 아닌 문재인정부 비난 주장으로 일관했다.

청문회 직후 기자들과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진 스미스 의원은 증인 중 한 명인 수전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를 애써 강조했다. 솔티 대표는 풍선에 넣는 내용물인 성경책과 USB를 내보였고 자신이 전단을 살포하는 현장에 여러 차례 갔었다는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스미스 의원이 보기에도 이인호 전 대사와 고든 창 변호사의 발언은 없던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스미스 의원을 찾아가 이 문제를 다뤄 달라고 요청한 사람들이 청문회를 개최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극우파 증인을 내세운 것이 실패다. 인권, 환경, 평화 같은 보편 가치에 관한 청문회에서 극단적으로 이견이 충돌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한국 정부 쪽의 입장을 주장할 증인을 내세운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문제가 제기되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던 한국대사관 측의 적극적 대응이 신선하다. 지구촌에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된 나라가 대한민국임을 보여주려는 대사관의 노력이 정말로 경이롭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아니어서 대면 청문회를 열었다면 접경지역 주민과 탈북자 출신이 직접 나와 증언을 했을 수 있다. 그랬으면 사실관계가 더 선명하게 밝혀졌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힘으로 간섭하고 압력을 가하는 미국의 행태를 멀리서 원망하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서 따지고 설명하는 게 더 효율적이란 것을 보여준 청문회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