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인포테인먼트… 자동차도 전자제품 시대

입력 2021-04-10 04:05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반도체 수급 대란’이 산업계 최대 이슈다. 특히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차량용 반도체 품귀가 심각하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발생한 수급 불안과 예측 실패가 맞물리며 빚어진 반도체 부족 현상은 세계 자동차 산업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해 자동차 수요가 위축되면서 차 업계는 반도체 부품 발주물량을 대폭 낮춰 잡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하반기부터 수요는 빠르게 회복됐다. 급히 제품 확보에 나섰지만 생산에 수개월이 걸리는 반도체를 조달하기란 불가능했고, 포드·GM·토요타·볼보 등 주요 자동차 제조 업체들은 물론 국내 업체들까지 생산을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시장조사기관 IHS마킷은 1분기 세계 자동차 생산 차질 규모를 100만대로 예상했고, 주요 기관들은 2분기 생산 물량 감소분이 1분기 규모를 크게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업계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다. 비대면 수요가 폭증하면서 차량용 반도체 대신 스마트폰·데이터센터용 반도체 생산을 늘렸다. 수요는 넘치는데 공급은 한정적인 현 상황은 최소 올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며, 공급 안정화까지는 최대 2년 이상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기술 발전과 시장 변화에 따라 자동차·반도체 업계 간 역학 구도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자동차는 전자제품’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시대다. 차량용 반도체는 종류가 다양하지만 차내 각종 시스템을 제어하는 장치로 이해하면 쉽다. 최근 전기차가 확산하면서 수준 높은 정보통신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했고, 탑재되는 반도체의 종류와 양도 늘어났다. 자동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주행 기술이 구현되고, 이동 중 정보와 즐거움을 전달하는 인포테인먼트도 중요해지면서 더욱 많은 반도체가 필요해질 전망이다.

글로벌 부족 현상 이유는

반도체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코로나19 확산 이후의 시장 변화다. 자동차 업체들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자동차 판매량이 연말 급격히 살아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반도체를 위탁 생산해주는 파운드리 공장은 폭증하는 정보기술(IT) 기기 수요에 맞춰 생산을 전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요 차량용 반도체 생산 업체들의 공장에 연이어 문제가 발생했다. 차 한 대에 200~300개가 탑재되는 MCU(마이크로 컨트롤러 유닛) 시장을 장악한 NXP(네덜란드)·르네사스(일본)·인피니언(독일)의 공장이 가동을 멈췄다. 미국 텍사스를 덮친 한파(NXP·인피니언)와 화재(르네사스)가 원인이었다.

업계는 이들 업체의 공급 정상화까지 최소 3개월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세계적 반도체 품귀 현상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란 평가다.

‘IT 기기용 VS 차량용’

차량용 반도체는 아직 전체 반도체 시장의 10분의 1에 불과한 ‘마이너’ 분야다. 차량용 반도체와 IT 제품용 반도체는 기술 수준부터 차이가 있다. 차량용 반도체는 8인치 파운드리 공정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이는 최신 12인치 파운드리 공정보다 구식 공정에 속한다. 세계 3위 파운드리 업체 글로벌 파운드리의 톰 콜필드 최고경영자(CEO)는 “자동차는 중앙처리장치(CPU)를 가지고 있지 않아 현 단계에서는 대단히 진보된 제조 공정 기술을 가진 제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량용 반도체는 단가가 낮아 생산 실익도 크지 않다. 반도체 업체로선 이미 수익성이 압도적인 스마트폰용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나 PC용 CPU의 주문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굳이 차량용 제품 주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수조원대 자금을 들여 최소 1~2년이 걸리는 공장을 증설할 유인도 부족하다. 소수 업체만이 자동차 업계의 압박에 대응하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생산 라인을 확충하는 정도다.

차 반도체 육성 목소리… 가능성 ‘글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최근 “앞으로 차량용 반도체 부가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라면서 국내 차량용 반도체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8.4%에 이르지만, 차량용 반도체 점유율은 2.3%에 그친다. 차량용 반도체를 국산 제품으로 내재화해 공급 부족 사태에 대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게 요지다. 정부 차원에서도 국내 자동차·반도체 업체 간의 협력을 통한 차량용 반도체의 자립화를 요구하고 있다.

업계는 고개를 내젓는다. 차 반도체 시장의 진입장벽이 높을뿐더러 낮은 이윤, 타 제품군의 높은 기술력 등을 감안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다. 차량용 반도체의 강자인 NXP, 인피니언, ST마이크로가 지난해 거둔 매출은 3조~4조원 정도다. 삼성전자 DS(반도체) 사업부는 72조원을 벌었다. 차량용 제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대량생산이 가능한 메모리 제품과 달리 자동차 칩은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다. 차 업체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한 대 사면 10년 가까이 타는 자동차 특성상 반도체 재고를 장기간 유지해야 해 설비 유연성도 떨어지고, 제품 결함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평판 악화는 물론 치러야 할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불어난다.

“고부가제품 노려야” 조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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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용 분야의 성장성이 무궁무진한 만큼 장기적으로는 국내 업체가 관련 시장에 뛰어들 가능성도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차량용 반도체 전체를 취급하기보다 유력 자동차 회사에 인포테인먼트용 AP를 공급하거나 고성능 메모리를 공급하는 형태의 전략을 구사해왔다. 또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테슬라·구글 등과도 협력을 이어가는 등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분야를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의 제어용 반도체가 높은 기술력을 요하는 AP 등의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통합된다면 업계 판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며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한 한국의 반도체·자동차 업계가 시장에 진입할 기회도 분명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