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시상식을 기다리는 건 윤여정씨가 후보로 올라서다. 솔직히 ‘미나리’가 작품상을 타느냐 마느냐보다 한국배우 최초로 윤여정씨가 연기상을 받느냐에 관심이 쏠린다. 본인은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지만 팬들의 기대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미리 보는 오스카’로 평가받는 미국배우조합상(SAG)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터라 기대감이 더 크다.
예능 탐구에서도 윤여정씨는 다룰 만한 인물이다. 연기력이야 입증된 바지만 그가 주도하는 예능의 세계 또한 각별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윤여정을 중심으로 대중문화지도를 그려보면 얼핏 집 모양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창으로 오늘의 세상을 흘낏 엿볼 수 있다. 최근 종영한 ‘윤스테이’는 윤여정과 홈스테이가 결합한 말인데 여기서 새로운 의미의 집과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윤스테이’ 후속으로 tvN에서 방송하는 프로는 ‘바퀴 달린 집 2’다. 슬로건이 ‘오늘은 여기서 잘까’가 아니라 ‘오늘은 여기서 살까’다. 그냥 잠만 자고 밥만 먹는 게 아니라 바퀴 달린 집을 타고 전국을 유랑하며 벗들을 초대해 하루를 살아보는 버라이어티다. 모양은 다르지만 영화 ‘미나리’에서 주인공 가족이 거주하던 곳도 ‘바퀴 달린 집’이었다. 놀랍게도 제93회 아카데미에서 ‘미나리’처럼 6개 부문 후보로 지명된 ‘노매드랜드’에도 ‘바퀴 달린 집’이 나온다. 참고로 노매드는 유랑민을 뜻한다. 고정관념이란 안경을 잠깐 벗고 그들을 다시 보면 노숙자(Homeless)는 집이 없는(Houseless) 게 아니라 지구 전체가 집인 사람이다. 루더 밴드로스의 노래 ‘하우스는 홈이 아니다’(A house is not a home)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앉지 않아도 의자는 의자다. 하지만 껴안아 줄 사람이 없다면 그건 집이 아니다.’(A chair is still a chair even though there’s no one sitting there. But A house is not a home when there’s no one there to hold you tight) 사람이 있어도 사랑이 없는 집은 위험하다는 걸 경고하는 듯하다.
집은 거기에 누가 살건 불멸의 아이템이다. EBS도 ‘건축탐구-집’을 매주 화요일 밤에 방송한다. 집에 관한 관심은 예능, 다큐멘터리뿐만이 아니다. 비슷한 시간대에 방송돼 ‘윤스테이’ 시청률을 잠식한 드라마가 ‘펜트하우스’다.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 지배하는 집이다. 공전의 히트작 ‘스카이캐슬’ 역시 희망의 집은 아니었다. 화려한 곳일수록 외로움이 지배하고 보은이 아니라 보복이 서식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21세기 주거 예능의 원조는 다행히 ‘사랑의 집’이었다.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신동엽의 러브하우스’ 문패가 보일 것이다. “카메라 있을 때와 없을 때가 확연히 다른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그에게 이 말을 듣고 나는 ‘예능의 거룩한 분노’라고 응답한 적이 있다. ‘러브 하우스’에서 그의 역할은 장난기 넘치는 산타클로스였다. 기획을 훑어보니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일반인의 주택을 뜯어고쳐 예쁜 집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는데 기억을 돌아보니 이 프로 최대의 수혜자는 가난한 집주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진행자 신동엽이었다.
20세기 말 잠시 위기를 맞았다가 2000년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한 코너인 ‘러브하우스’로 복귀하면서 신동엽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독신주의를 표방하던 그가 이 프로 덕분에 결혼하게 된 것도 화제였다. 그의 아내 선혜윤 PD는 당시 ‘러브하우스’ 조연출이었다. 신동엽의 처지에서 보면 집이 아니라 삶을 바꿔준 프로였던 셈이다.
2016년엔 ‘가족의 개성에 맞게 공간도 바뀌어야 한다’는 취지로 ‘렛미홈’(Let 美 Home)이라는 프로그램이 tvN에서 방송됐다. 같은 제목으로 버닝 헵번이 부른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화려했던 불빛들/ 사람들 목소리도 떠나간 거리에 남아서 홀로 걷다가/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외로운 집은 동굴이나 다름없다. 집에 온기와 활기를 불어넣는 작업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다. ‘러브하우스’ 키워드가 리모델링이었다면 2017년 이경규의 ‘내 집이 나타났다’(JTBC)는 아예 집을 새로 지어주는 프로였다. 협찬의 규모가 그만큼 달라진 거다.
현재 방송 중인 ‘구해줘 홈즈’(MBC)의 현수막은 ‘당신의 집 우리가 구해드립니다’다. 고쳐주고 지어주다가 이젠 구해주는 예능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시청률로 재미를 보는가 싶더니 후속이 또 나왔다. 이번엔 ‘바꿔줘 홈즈’다. 과감하게 ‘놀면 뭐하니’ 시간에 긴급 편성했다. 여러 재미의 요소를 버무린 이 프로의 정체성은 제작진이 밝힌 대로 ‘인테리어 배틀 쇼’다. 전문가의 노하우가 담긴 홈 키트를 제공받은 후 정해진 시간 내 셀프인테리어에 도전한다. 홈즈 시리즈는 영국추리소설의 주인공(셜록 홈즈) 이름을 연상케 한다. 홈즈는 친구인 왓슨과 콤비로 유명한데 예능에서도 출연자끼리의 콤비(앙상블)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메인이 정해지면 그와의 화학적 응집력이 멤버구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마침내 집은 과학과 상상의 세계에까지 도전장을 내밀었다. 판타지와 집이 결합한 ‘나의 판타집’(SBS)이 탄생한 거다. 출연자가 직접 살아보면서 자신이 꿈꾸는 환상의 집을 구체화하는 과정을 담은 관찰프로그램이다. 사령탑이 시사교양본부인 점도 특이하다. 하기야 시청자에게 장르의 구분은 재미 앞에서 무기력한 태도다.
‘종이의 집’(La Casa de Papel)이란 스페인 드라마가 있는데 영어 제목은 ‘금전강도’(Money Heist)다. 지능적으로 거액을 훔치는 스토리다. 돈을 쌓아두려는 인간의 욕망을 풍자한 뜻도 일부 포함됐을 것이다. 집을 소재로 한 고전(?)가요 중에는 남진의 ‘님과 함께’가 있다. 트로트의 융성과 함께 이 노래도 자연스럽게 부활했다. 거기에 보면 선망의 대상인 ‘그림 같은 집’이 ‘저 푸른 초원 위에’ 있다. 그러나 ‘멋쟁이 높은 빌딩’이나 ‘유행 따라 사는’ 재미보다는 ‘반딧불 초가집’이라도 ‘님과 함께 같이’ 사는 게 더 행복하다고 자각한다. 만약에 돈과 함께 살래, 님과 함께 살래 이렇게 물으면 어떤 답이 많이 나올까. 혹시 돈이랑 님이랑 함께하는 삶은 안 되겠냐고 묻지 않을까. 그러나 돈과 님의 공존이 확률상 간단치만은 않다.
다시 ‘윤스테이’로 돌아가자. 인근에 ‘효리네 민박’이 있다. 둘 다 리얼리티예능이고 윤여정과 이효리의 개성이 프로그램의 중추다. 이효리는 핑클의 멤버로 예능을 시작했다. 비주얼 담당이었지만 그 비주얼에 캐릭터가 드러났다.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이 팬들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를 이렇게 해석한 적이 있다. “꾸미면 화려한데 민낯은 소탈하다. 주름살은 있어도 구김살은 없다. 중요한 건 주관과 자신감이다.”
윤여정 신동엽 이효리의 공통점은 귀엽고 솔직한 센스장이라는 것이다. 잘생기면 거부감이 들어도 귀염 앞에선 대체로 무장해제다. 미남미녀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귀여운 사람들과는 동행하고 싶어진다. 유머센스는 유연제 역할을 한다. 나이는 장애요소가 아니다. “다른 분들은 너무 진지한데 전 안 그래요.”(They are so serious, I am not that serious) ‘미나리’ 상영 뒤 관객과 대화시간에 윤여정이 한 말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의 포스터에 쓰인 조커(히스 레저)의 명대사가 뭐였더라. “뭐가 그렇게 심각해.”(Why so serious)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제 겉만 보지 말고 곁을 보자. 겉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가 보이지만 곁을 보면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가 보인다. 그 사람 곁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를 보면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가 대충 보인다. 혹시 지금 당신의 속은 어떤가. 속이 상하면 겉도 상한다. 너무 심각하지 않기, 너무 속상하지 말기,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그것이 주거 예능의 주역들이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