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운하가 컨테이너선 좌초로 막혀 있을 때였다. 제주도에서 함께 노는 친구들은 대부분 낚싯배를 갖고 있다. 강풍에 운하 옆으로 밀렸다더라, 조타실에서 졸았나, 파라오의 저주라던데…. 본 대로, 들은 대로 나름 원인을 찾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일을 제주도에서 알 수 있겠나. 내가 엉뚱하게 한마디 했다. 그게 다 아무개 때문이야. 선거에 많이 등장하는 정치인 이름을 댔다. 아님 저무개 때문인가? 말도 안 되는 음모론 패턴으로 웃자고 패러디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좌중이 큭큭대거나 아니 다른 누구 때문이야 라고 말이 이어져야 할 텐데 순간 뚝 끊어졌다. 수에즈운하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육지에서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와 종교 얘기는 하지 않는다. 개인별로 이념과 신념이 달라 논쟁의 끝이 없고 답이 없다. 제주도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다. 그것이 특히 좌우의 이념이 조금이라도 걸치는 정치 얘기라면 금기에 해당한다. 불과 70여년 전 7년 동안(1948~1954) 당시 제주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만5000~3만명의 부모, 형제, 친척, 이웃이 사망한 4·3사건이라는 불행을 그들이 경험했다. 그리고 군사정권까지 오래도록 4·3을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가족 중에 한 명이 산으로 올라가면 남은 가족이 죽거나 고초를 겪어요. 며칠 뒤 밤이 되면 밀고한 사람이 죽창에 맞아 죽고 집에 불이 나요.” 산으로 올라간 사람 가족이 누구인지, 밀고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은 다 알고 있다. 그들이 지금도 한 마을에, 멀어봐야 이웃 마을에 함께 살고 있다. 산에 올라간 사람도, 밀고한 사람도 나름의 신념과 사정이 있었다고 짐작만 한다. 그리고 하는 말은 “지금 얘기하면 뭐할 거요”다.
당시 정부는 경찰과 군 외에 서북청년단을 제주도 사태 진압에 투입했다. 그들의 횡포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장이나 조합장에게 밤이 되면 처녀를 데려오라는 거야. 누구를 데려갈 거야. 다 아는 집 애들인데. 자기 마누라를 보냈잖아.” 이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안다. 이들은 4·3을 겪고 제사 때마다 친척들이 모이면 당시를 떠올리며 얘기를 나눴다. 어린아이들은 이 얘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다. 어린아이들이 자라 다시 제삿날이 돌아오면 그날을 얘기하며 명심한다. 그 아이들이 또 듣는다. 그들은 다 기억하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해방 이후 좌파와 우파 세력의 갈등으로 야기됐다. 1947년 3·1절 기념식 시위에서 좌우 세력의 우발적 충돌이 시간이 지나며 확대됐다. 이듬해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하고 이의 진압 과정에서 봉기 세력뿐 아니라 무고한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에서 서촌 구장이 밤중에 내려와 식량을 모아 달라는 마을 출신 폭도들에게 “부탁햄시메 쌀을 모아도랜 말앙. 억지로 빼앗앙가게”라고 한다. 자진해서 쌀을 모아주었다가 나중에 경찰에 알려지면 어떻게 하냔 말이다. 4·3 추념식에서 대통령이 추념사만 했다 하면 뒤끝을 남기는 판이다. 제주도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나.
박두호 전 언론인